소녀는 인파 속에 섞여 지나가는 흐릿한 사람들을 본다. 흔히 말하는 유령이다. 소녀는 어릴 때부터 유령을 볼 수 있었다. 유령은 영화에서처럼 하늘을 떠다니거나 하얀 죽처럼 생기지 않았고, 벽을 뚫고 다니거나 몸이 자유자재로 변하지도 않았다. 사람처럼 옷을 입고 두 발로 걸어 다녔으며, 문으로 드나들고 버스나 지하철도 탔다. 누가 봐도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기에, 오랜 시간 소녀는 그들이 유령인 줄 몰랐다.
소녀가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탔던 어느 날부터였다. 그날 버스에 먼저 오른 소녀는 빈자리가 없어 의자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때 뒤에 탄 소녀의 엄마가, 자리 있는데 왜 서서 가려 하냐며 소녀의 반대 손을 잡아당겼다. 분명 버스에 빈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소녀의 엄마는 성큼성큼 뒷자리로 갔고, 두 사람이 다가가자 앉아있던 학생 한 명이 당연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소녀의 엄마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받을 만큼 나이가 많지 않았다. 소녀의 엄마와 자리를 비켜준 학생 모두 양보를 받거나 하는 기색도 없었다. 엄마는 소녀를 자리에 앉혔다. 소녀는 언니가 이번에 내리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학생은 문 옆에 서서 다섯 정거장을 더 간 뒤에야 버스에서 내렸다. 그 뒷모습이 순간 흐릿하게 보여 소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나서야 소녀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까 여기 어떤 언니 앉아있었는데, 왜 빈자리라고 했어? 응, 누구? 어떤 언니 앉아있었잖아, 이런 안경 끼고 교복 입고, 되게 큰 가방 들고 있던 언니. 얘는 그새 꿈을 꿨나, 여기 아무도 없었어.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엄마는 아무도 보지 못한 것처럼 얘기했다. 아무리 소녀가 열심히 설명해도 엄마는 그런 사람 없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소녀가 같은 얘길 반복하자 엄마는 그럼 지금 그 언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학생이 내리고 두 정거장이 지난 뒤였다.
그날 이후 소녀는 버스에서 만난 학생과 비슷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보았다. 남자와 여자, 학생부터 노인까지, 성별과 나이는 다양했지만, 그들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앉을 곳을 양보했다. 남의 자리를 빌려 앉았다가 주인이 나타나 비켜주는 사람처럼, 그들은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연스레 일어났고, 다가온 누군가는 처음부터 빈자리였다는 듯 그곳에 앉았다. 그들은 그렇게 일어나 몇 정거장이고 서서 간 뒤에야 차에서 내렸다. 심지어 그들은 문 옆에 기대서서 가다가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다른 곳으로 갔다. 사람들은 늘 그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이 무섭기라도 한 듯 물러났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조금씩 흐릿해졌다. 처음엔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매번 그런 일이 반복되자 소녀는 그들이 원래 흐릿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내 그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이들이 왜 흐릿한 사람들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지도 알았다. 그날 엄마가 교복 입은 언니를 보지 못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 오직 소녀만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흐릿하게나마 소녀의 눈에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소녀는 그들을 유령이라 불렀다.

2012.03.16.27:44.
시와무지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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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의 정원을 기억해.

2011. 12. 30. 07:35 /2011-



그 밤의 정원을 기억해. 내 키의 두 배만 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고, 그 가운데로 작은 오솔길이 이어져있었어. 정확한 계절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겨울의 초입 혹은 끝자락이었던 것 같아.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었고,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났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나무는 앙상한 가지뿐이었어. 왠지 그 나무들은 봄이 되어도 싹을 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어. 정원 어디에서도 녹음은 찾아볼 수 없었어. 풀이 말라 색이 바랜 것도, 눈이 내려 사방을 덮은 것도 아닌데, 구름에 가린 옅은 달빛 아래 정원은 화산재라도 뒤집어쓴 듯 온통 회색빛이었어. 처음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어. 누군가가 거대한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림이라도 그려놓은 것 같았어. 정말 뭐가 묻은 건 아닐까, 나무를 만지는 내 손이 이질적으로 느껴졌어. 색을 가진 것이라곤 너와 나뿐이었어. 흑백텔레비전 속에 들어온 것처럼. 놀라는 나를 보며 너는 그저 웃고만 있었어.
짧지 않은 오솔길을 걸으며 너와 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회색의 정원. 네가 매일 밤 거니는 곳이라고 했어. 그 얘길 들어서일까. 낯설었던 풍경은 어느덧 눈에 익숙해졌고, 몇 번이고 와본 곳처럼 너와 함께 정원을 걷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어. 한참을 걷다 문득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서야 알았어. 정원은 너를 닮아있었어. 유치한 얘기지만, 그 순간 난 너의 꿈에 초대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
달빛이 약해서일까. 나무가 빼곡히 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솔길은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았어. 난 그저 너를 따라 걸었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나무 끝에 비스듬히 걸려있던 달이 하늘 가운데 왔을 때쯤 오솔길은 끝났어. 그곳엔 작은 연못이 있었어. 너무 어두워서인지 못은 주변을 두른 나무조차 비추지 못하고 검게 고여 있었어. 옆을 돌아보자 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어. 구름이 넓게 펼쳐진 듯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어. 달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형태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고. 문득 이 모든 것이 정말 꿈은 아닐까, 혹시 이대로 깨는 건 아닐까 불안했어. 다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네가 없을 것 같았거든. 갑작스러운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하던 그때,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쏟아졌어. 그날 처음으로 본 선명한 달이었어. 눈이 부셨어. 내내 어둡던 하늘에 갑자기 비췬 달빛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달빛 아래 회색의 정원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어. 앙상한 가지뿐이던 나무와 넓게 드리운 풀밭이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였어. 백금과 은을 모아 만든다 해도 그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정원은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게 가라앉았던 연못은 한가운데 달을 띄우고 주변에 선 나무들을 비추며 거대한 은빛의 별이 되어 일렁였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꿈이라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아름답다는 말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어. 간신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을 때, 놀라는 나를 보며 말없이 너는 그저 웃고만 있었어.

2011.12.29.31:35.
달에닿아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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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도록 잠들지 못했다. 너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돌아온다 했다. 오늘 밤 반드시 돌아올 거라 그랬다. 계절의 초입임에도 겨울의 밤은 지겨우리만큼 길었다. 전화기를 두 손에 쥔 채 눕지도 못하고 밤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올 리 없었다. 네가 돌아오는 날인데 어떻게 잠들 수 있겠어.
춥잖아. 다음부턴 나오지 마.
그때 그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오늘 밤도 집 앞에 서있었을 것이다. 손발이 얼어붙고 감각이 무뎌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그날 밤처럼, 추위도 잊은 채 너를 기다렸을 것이다. 감정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너를 기다릴 때면 오직 설렘과 불안만 느낄 수 있는 사람처럼 다른 감각에 둔해졌다. 추위나 허기는 물론 피곤함도 느끼지 못했다. 너를 기다리는 밤은 늘 그랬다. 몇 해가 지났지만 이 밤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안해하지 마. 조금 늦더라도 꼭 돌아올 테니까. 너도 알잖아. 내가 머물 곳은 여기뿐이라는 걸.
처음엔 막연한 불안이었다. 오랜만에 느낌 감정이라 지나치게 유난을 떠는 거라 생각했다. 허나 오래지 않아 근거 없는 불안이 아님을 깨달았고,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너의 조금은 내겐 너무 긴 시간이었다. 한 번, 두 번, 반복된 너의 빈자리에 나는 미치도록 초조했다. 무언가에 중독돼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너의 공백은 나를 무너뜨렸다. 도대체 무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던 그날 밤, 네가 두 번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난 너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아니 정신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며칠이 지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넌 다시 짐을 꾸리고 있었다. 가는 거야? 신기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네가 없는 동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지난날이 무색할 만큼, 다시 떠나려는 널 보며 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네가 떠나는 모습을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익숙해진 걸까. 익숙해질 수 있는 감정이었을까. 단출한 식사. 짧지만은 않은 포옹. 멀리 나가지 않았던 인사. 넌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난 오래 서있지 않았다. 네가 떠난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가. 아니면 또 울면서 날을 지새웠던가. 확실한 건 그 이튿날부터 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지난 몇 해간의 기억이, 너와의 추억이 모두 긴 꿈이었던 것처럼, 너와 완전히 이별한 듯 그렇게 살았다. 날이 밝는다. 아직 달은 지지 않았다. 겨울의 밤은 해가 떠도 끝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올 리 없다. 올 리, 없다.

2011.11.15.29:39.
이상은 초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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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빠짐없이 치웠다. 바쁜 하루였다.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움직인 것 같은데 시간은 빠르게 갔다. 커다란 상자를 준비했다. 방을 정리하며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았다. 네가 준 것, 너와 함께 산 것, 너의 손이 닿았던 것, 너의 사진, 너를 떠올릴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건 모두. 방 구석구석에 너의 흔적이 숨어있었다. 나조차 잘 모르는 곳에서 네가 발견되었을 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넌 책장 뒤에 번진 곰팡이처럼 지저분하고 눅눅하게 내 방 곳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진한 곰팡이였다.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로 몇 번이고 문질러야 했다. 칼로 파낸 것이 아닌 이상 지워지지 않는 건 없었다. 너와의 기억은 진하지만 날카롭진 않았다. 가득 찬 상자가 두 개. 그리고 반 쯤 찬 상자가 하나. 세 개의 상자에 나눠 담긴 넌 버려진 고양이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생각도 잠시. 단 한 번도 애처로운 눈빛 같은 건 지은 적 없는 너였기에, 정작 버려진 건 고양이가 아닌 나이기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다.
상자를 버리고 돌아온 방은 어딘가 휑하고 허전했다. 몇 개 안되는 가구의 위치를 바꿔보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원래대로 옮겼다. 책상 위를 정리하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을 책장에 꽂았다. 쌓여있던 영수증과 우편물을 정리해 버렸다. 빨래로 가득 차 있던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기로 먼지를 치우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욕실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했다. 세탁기 시간이 남아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한 바퀴 돌리도록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없어 몇 번이고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았다. 건조된 빨래를 개어 옷장에 넣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는 한 끼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배는 고프지 않았다. 밥을 먹으려다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 욕조에 물을 받았다. 컵에 우유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은 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무언가 정리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새롭게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소리와 함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고 별 뜻 없이 고개를 돌린 곳엔
네가 쓰던 면도기가 있었다.
고요와 평온이 한 순간에 깨졌다. 믿기지 않았다.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 갑자기 어디선가 생겨난 것 같았다. 다른 어떤 물건이 있었다 해도, 심지어 낯선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한들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현실감이 없었다. 저게 왜 여기 있는 거지. 깜빡 잊고 치우지 않았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방 안 모든 곳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면도기 바로 옆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의 칫솔이 놓여있었다. 칫솔은 치웠으면서 면도기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자리엔 면도기는커녕 무엇도 놓여있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알 수 없었다. 난 그렇게 한참동안 면도기를 보았다. 너의 면도기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욕조에서 나와 면도기를 집어 들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면도를 하던 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에서 막 깨었을 때 까끌까끌하던 네 수염도. 그 수염으로 나를 간지럽히며 웃던 너의 얼굴이, 힘든 일이 있어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기분 좋게 웃어주던 너의 미소가, 괜찮다며 나를 위로해주던 너의 목소리가, 품에 안기면 은은하게 느껴지던 너의 향기가, 따뜻하고 포근했던 너의 체온까지. 빠르고 강렬하게 너의 기억이 쏟아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치웠다 생각했다. 여섯 개의 칼날이 손목을 긋고 지나갔다. 고작 세 개의 상자로 버려질 네가 아니었다. 정리해야 하는 건 방이 아니었다. 내 몸이,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무언가 정리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새롭게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2011.05.06.26:16.
Quintero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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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이 남아있었다.

2011. 4. 25. 00:40 /2011-



화분이 남아있었다. 모두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것도 네가 준 것이었다. 꽃만 안 피면 되는 거지. 이거 꽃 안 펴. 이게 다 자란 거야. 삭막하잖아, 컴퓨터하고 사무용품 밖에 없는 책상이라니. 별로 크지도 않으니까 책상 위에 놔. 이것도 살아있는 거야, 함부로 버리고 그러면 안 돼.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기억에 남아서일까. 모든 게 버려진 뒤에도 화분은 남았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누가 누굴 버렸는지 따지는 건 의미 없다. 이별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려지는 일이다. 물 안줬지. 하여튼 이러면 안 된다고. 너 물 안마시고 살 수 있어? 얘도 물을 줘야 살지. 말려 죽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다 너. 누가 더 잔인했던 걸까. 조금씩 마르고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지기 직전까지 갔다. 물통을 쥐고 있으면서 단 한 방울도 떨어뜨려주지 않았다. 물통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뒤늦게 떨어진 물방울은 메마른 잎사귀를 바스러뜨렸다. 지쳤던 거다. 그저 간신히 견디고 있었을 뿐, 물방울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나약해져 있었다. 멍하니 죽어버린 잎을 바라보며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뿌리 끝까지 마른 풀은 신이 아닌 이상 살릴 수 없었다. 너와 난 신이 아니었다. 식물 하나를 말라 죽인 허술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을 뿐이다. 말라 죽은 풀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작은 화분에 갇혀 살던 식물은 죽어서조차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몇 십 년이 지나야 썩어 없어질 비닐봉투 속에서 온갖 폐기물에 뒤섞여 악취를 견디며 고통스러워 할 거다. 지옥이 따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버려졌다. 버려진 것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화분이 남아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어디선가 낯선 향이 나 고개를 돌려보니 화분이 있었다. 꽃 하나 피지 않은 풀에서 향기가 났다. 이 풀에서 향기가 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2011.04.24.24:40.
Savina & Drones Where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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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 나뒹구는 맥주 캔만 늘고 있어. 아무리 취해도 잠이 오지 않아. 어떻게 하라고. 새벽이잖아. 마음껏 소리칠 수도 없어. 전화기에서 지운 네 번호가 왜 술만 마시면 또렷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그날 네가 울었던가. 난 울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날도 난 글을 썼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어. 어처구니없지. 실감이 안 났던 걸까. 오히려 그날 평소보다 글이 잘 써졌다면 넌 믿을까. 아주 익숙한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난 키보드를 두드렸어. 그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평소보다 늦게 잠든 어느 날, 난 죽은 듯 긴 잠을 잤어.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뒤척이는 일 한 번 없는 깊은 잠이었어. 서너 장의 페이지를 한꺼번에 넘긴 듯 시간이 뭉텅이로 넘어갔어. 잠에서 깼을 땐 저녁이었어. 습관처럼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떠지지 않는 눈을 비볐어. 문서 폴더로 들어가 잠들기 전까지 썼던 글을 클릭해 열었어. 마우스 휠을 돌리며 글을 읽던 난, 내가 아직 잠에서 덜 깬 줄 알았어. 쓰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글이 적혀있는 거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 썼던 부분부터 다시 읽다가야 깨달았어. 그건 너에 대한 글이었어. 난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어. 거기엔 내가 알고 있던 너, 내가 기억하는 네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어.
정신을 차렸을 때, 노트북은 모니터가 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난 책상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울고 있었어. 겁에 질린 짐승처럼 서럽게 울었어. 그날 난 먼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네 뒷모습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그날 내가 울었던가. 넌 울지 않았던 거 같은데.

2011.04.17.30:56.
Athlete Cha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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