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이 남아있었다.

2011. 4. 25. 00:40 /2011-



화분이 남아있었다. 모두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것도 네가 준 것이었다. 꽃만 안 피면 되는 거지. 이거 꽃 안 펴. 이게 다 자란 거야. 삭막하잖아, 컴퓨터하고 사무용품 밖에 없는 책상이라니. 별로 크지도 않으니까 책상 위에 놔. 이것도 살아있는 거야, 함부로 버리고 그러면 안 돼.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기억에 남아서일까. 모든 게 버려진 뒤에도 화분은 남았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누가 누굴 버렸는지 따지는 건 의미 없다. 이별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려지는 일이다. 물 안줬지. 하여튼 이러면 안 된다고. 너 물 안마시고 살 수 있어? 얘도 물을 줘야 살지. 말려 죽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다 너. 누가 더 잔인했던 걸까. 조금씩 마르고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지기 직전까지 갔다. 물통을 쥐고 있으면서 단 한 방울도 떨어뜨려주지 않았다. 물통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뒤늦게 떨어진 물방울은 메마른 잎사귀를 바스러뜨렸다. 지쳤던 거다. 그저 간신히 견디고 있었을 뿐, 물방울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나약해져 있었다. 멍하니 죽어버린 잎을 바라보며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뿌리 끝까지 마른 풀은 신이 아닌 이상 살릴 수 없었다. 너와 난 신이 아니었다. 식물 하나를 말라 죽인 허술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을 뿐이다. 말라 죽은 풀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작은 화분에 갇혀 살던 식물은 죽어서조차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몇 십 년이 지나야 썩어 없어질 비닐봉투 속에서 온갖 폐기물에 뒤섞여 악취를 견디며 고통스러워 할 거다. 지옥이 따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버려졌다. 버려진 것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화분이 남아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어디선가 낯선 향이 나 고개를 돌려보니 화분이 있었다. 꽃 하나 피지 않은 풀에서 향기가 났다. 이 풀에서 향기가 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2011.04.24.24:40.
Savina & Drones Where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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