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빠짐없이 치웠다. 바쁜 하루였다.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움직인 것 같은데 시간은 빠르게 갔다. 커다란 상자를 준비했다. 방을 정리하며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았다. 네가 준 것, 너와 함께 산 것, 너의 손이 닿았던 것, 너의 사진, 너를 떠올릴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건 모두. 방 구석구석에 너의 흔적이 숨어있었다. 나조차 잘 모르는 곳에서 네가 발견되었을 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넌 책장 뒤에 번진 곰팡이처럼 지저분하고 눅눅하게 내 방 곳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진한 곰팡이였다.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로 몇 번이고 문질러야 했다. 칼로 파낸 것이 아닌 이상 지워지지 않는 건 없었다. 너와의 기억은 진하지만 날카롭진 않았다. 가득 찬 상자가 두 개. 그리고 반 쯤 찬 상자가 하나. 세 개의 상자에 나눠 담긴 넌 버려진 고양이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생각도 잠시. 단 한 번도 애처로운 눈빛 같은 건 지은 적 없는 너였기에, 정작 버려진 건 고양이가 아닌 나이기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다.
상자를 버리고 돌아온 방은 어딘가 휑하고 허전했다. 몇 개 안되는 가구의 위치를 바꿔보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원래대로 옮겼다. 책상 위를 정리하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을 책장에 꽂았다. 쌓여있던 영수증과 우편물을 정리해 버렸다. 빨래로 가득 차 있던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기로 먼지를 치우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욕실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했다. 세탁기 시간이 남아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한 바퀴 돌리도록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없어 몇 번이고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았다. 건조된 빨래를 개어 옷장에 넣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는 한 끼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배는 고프지 않았다. 밥을 먹으려다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 욕조에 물을 받았다. 컵에 우유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은 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무언가 정리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새롭게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소리와 함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고 별 뜻 없이 고개를 돌린 곳엔
네가 쓰던 면도기가 있었다.
고요와 평온이 한 순간에 깨졌다. 믿기지 않았다.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 갑자기 어디선가 생겨난 것 같았다. 다른 어떤 물건이 있었다 해도, 심지어 낯선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한들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현실감이 없었다. 저게 왜 여기 있는 거지. 깜빡 잊고 치우지 않았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방 안 모든 곳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면도기 바로 옆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의 칫솔이 놓여있었다. 칫솔은 치웠으면서 면도기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자리엔 면도기는커녕 무엇도 놓여있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알 수 없었다. 난 그렇게 한참동안 면도기를 보았다. 너의 면도기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욕조에서 나와 면도기를 집어 들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면도를 하던 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에서 막 깨었을 때 까끌까끌하던 네 수염도. 그 수염으로 나를 간지럽히며 웃던 너의 얼굴이, 힘든 일이 있어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기분 좋게 웃어주던 너의 미소가, 괜찮다며 나를 위로해주던 너의 목소리가, 품에 안기면 은은하게 느껴지던 너의 향기가, 따뜻하고 포근했던 너의 체온까지. 빠르고 강렬하게 너의 기억이 쏟아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치웠다 생각했다. 여섯 개의 칼날이 손목을 긋고 지나갔다. 고작 세 개의 상자로 버려질 네가 아니었다. 정리해야 하는 건 방이 아니었다. 내 몸이,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무언가 정리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새롭게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2011.05.06.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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