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의 정원을 기억해.

2011. 12. 30. 07:35 /2011-



그 밤의 정원을 기억해. 내 키의 두 배만 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고, 그 가운데로 작은 오솔길이 이어져있었어. 정확한 계절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겨울의 초입 혹은 끝자락이었던 것 같아.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었고,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났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나무는 앙상한 가지뿐이었어. 왠지 그 나무들은 봄이 되어도 싹을 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어. 정원 어디에서도 녹음은 찾아볼 수 없었어. 풀이 말라 색이 바랜 것도, 눈이 내려 사방을 덮은 것도 아닌데, 구름에 가린 옅은 달빛 아래 정원은 화산재라도 뒤집어쓴 듯 온통 회색빛이었어. 처음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어. 누군가가 거대한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림이라도 그려놓은 것 같았어. 정말 뭐가 묻은 건 아닐까, 나무를 만지는 내 손이 이질적으로 느껴졌어. 색을 가진 것이라곤 너와 나뿐이었어. 흑백텔레비전 속에 들어온 것처럼. 놀라는 나를 보며 너는 그저 웃고만 있었어.
짧지 않은 오솔길을 걸으며 너와 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회색의 정원. 네가 매일 밤 거니는 곳이라고 했어. 그 얘길 들어서일까. 낯설었던 풍경은 어느덧 눈에 익숙해졌고, 몇 번이고 와본 곳처럼 너와 함께 정원을 걷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어. 한참을 걷다 문득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서야 알았어. 정원은 너를 닮아있었어. 유치한 얘기지만, 그 순간 난 너의 꿈에 초대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
달빛이 약해서일까. 나무가 빼곡히 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솔길은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았어. 난 그저 너를 따라 걸었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나무 끝에 비스듬히 걸려있던 달이 하늘 가운데 왔을 때쯤 오솔길은 끝났어. 그곳엔 작은 연못이 있었어. 너무 어두워서인지 못은 주변을 두른 나무조차 비추지 못하고 검게 고여 있었어. 옆을 돌아보자 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어. 구름이 넓게 펼쳐진 듯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어. 달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형태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고. 문득 이 모든 것이 정말 꿈은 아닐까, 혹시 이대로 깨는 건 아닐까 불안했어. 다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네가 없을 것 같았거든. 갑작스러운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하던 그때,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쏟아졌어. 그날 처음으로 본 선명한 달이었어. 눈이 부셨어. 내내 어둡던 하늘에 갑자기 비췬 달빛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달빛 아래 회색의 정원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어. 앙상한 가지뿐이던 나무와 넓게 드리운 풀밭이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였어. 백금과 은을 모아 만든다 해도 그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정원은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게 가라앉았던 연못은 한가운데 달을 띄우고 주변에 선 나무들을 비추며 거대한 은빛의 별이 되어 일렁였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꿈이라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아름답다는 말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어. 간신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을 때, 놀라는 나를 보며 말없이 너는 그저 웃고만 있었어.

2011.12.29.31:35.
달에닿아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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