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날 부를 수 있을까.
신고되지 않은 삶이었다. 나를 낳은 두 사람은 무슨 이유에선지 내 출생을 나라에 알리지 않았다. 나라는커녕 나도 내 이름을 모른다. 두 사람이 날 부르던 방법이 있을 텐데, 이거든 저거든 아니면 그거든. 어쩌면 지금껏 내가 들었을 누군가의 이름과 같은 것이든, 무언가 있어서 불렀을 텐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동물도 자신을 부르는 걸 아는데, 아무리 기억을 못하는 어릴 때라도 충분히 들었다면 뭔가 반응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난 그마저 충분히 듣지 못했나 보다. 당연히 두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동안은 두 사람과 함께였다. 그렇게 들었다. 날 맡긴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고, 그 사람들이 그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그 얘길해 준 건 노인이었다. 난 노인과 함께 컸다. 모두가 노인이라 불렀기에 난 그게 그의 이름인 줄 알았다. 다른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 또는 그 중간에서 엄빠나 아마를 발음할 때 난 노인이 되지 못한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노이라거나 노옹이나 느이 혹은 노 같은. 엄빠 아마와 달리 노이나 노옹 느이는 옹알이와 다름없었고, 노인은 그 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으로 입을 떼는 아기를 누가 상상이나 할까.
그럼에도 내 첫 말은 노인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이 노인과 함께였고, 노인은 말을 못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다른 사람이 노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에 반해 노인은 늘 말이 아닌 눈과 손으로 날 불렀다. 나 역시 본의 아니게 소리가 아닌 눈과 손, 몸짓으로 노인을 불렀다. 하릴없이 눈으로 봐야만 서로를 알 수 있는 관계였다.
내가 옹알이를 한 것이 아니라 노인을 불렀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무렵, 노인은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라디오를 켜놓았다. 밤이 되면 방에 불을 켜듯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부터 켰다. 그렇게 잠들기 직전까지, 때론 켜놓은 채로 잠이 들었다. 나중에야 내가 말을 더디게 배울까봐 그랬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라디오는 노인이 고용한 나의 말 선생이었다. 외국어를 못하는 사람이 무작정 외국인의 말을 계속 듣는 것처럼 라디오를 들었다. 그덕에 방안엔 수시로 음악이 흘렀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말소리보다 음악이 좋았다.
두 사람의 얼굴도, 날 부르던 방법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노인과 들었던 노래들은 기억한다. 그 당시 히트했던 가요는 물론 광고 음악나 시그널까지.
그 소리가 내 첫 기억이다.

2019.01.23.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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