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이었다지요.

2017. 11. 16. 03:34 /2015-



오늘도 당신 생각에 잠에서 깼어요.

상강이었다지요.
그래서인지 이 새벽엔
서리가 내리는 곳도 있다고 해요.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봄이었는데
어느덧 여름이 지나 가을이 한창이라
그때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고 있어요.
참 이상해요. 기억도 희미한 첫 만남인데
오랜만에 꺼낸 옷 주머니에선
어김없이 당신이 발견돼 멈칫하게 되네요.

따뜻한 옷을 꺼내 입어도
가슴 한 편이 서늘한 건
오늘이 상강이라 그럴 겁니다.
서리가 내리는 날이라잖아요.

봄여름 푸르렀던 잎은
꽃이 아니어도 붉고 노랗게 피며
마지막 계절을 장식하는데
당신과 나는 한껏 푸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떨어져 버렸어요.
용기가 없고 미련한 저라,
당신과 아름다울 계절마저 놓쳐버렸네요.

누군가를 잊는다는 건
홀로 작은 장례식을 여는 것과 다름없겠지요.

차마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지 못하는 건
오늘이 상강이라 그럴 겁니다.
국화가 활짝 피는 날이라잖아요.

아름다워서, 너무 아름다워 그런 거라고
아무도 듣지 않을 핑계를 대 봅니다.

상강이었다지요.
모든 곳에 서리가 내려도
당신은 춥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절정을 맞은 단풍과 활짝 핀 국화처럼 아름답되,
이별과는 먼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2017.10.23.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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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기도가 흐려집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살아가는 나날이란 나아지는 구석 없이 이 모양입니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모릅니다. 덧셈과 뺄셈을 배우지 못했으니 그 뒤에 모든 것은 외계어나 다름없습니다. 내게 관계는 늘 그런 것이었습니다. 미처 배우지 못해 시간이 갈수록 난해해지고 대체 뭘 어디서부터 익혀야 다른 사람들처럼, 아니 조금이라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온갖 것을 배울 수 있는 세상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디서도 알려주지 않는 기분입니다. 모두들 어떻게 배우고 익히는 걸까요. 어디까지가 자연스러운 건지,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부자연스러움을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스러움의 벽이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가요. 새벽마다 내리는 비에 마음은 가장 먼저 젖어 쉽게 찢어집니다. 아무리 말려도 서로 달라붙어 펼쳐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햇볕을 쬐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늘어갑니다. 잠은 늘 꿈과 함께 왔고, 외로움은 꿈이라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보름달이 뜬 밤이었습니다. 달이 참 밝다 생각했는데, 구름은 달보다 가까웠고 이내 다시 비가 내렸습니다. 번쩍이며 어둠을 지우고 하늘이 무너질 듯 울며 잠을 쫓았습니다. 빗소리는 점점 가까워집니다. 나는 점점 멀어집니다. 오늘의 내가 잠들면 조금 더 외로운 기억을 지닌 채 더 약하고 공허해진 내일의 내가 깹니다. 밤은 유일한 안식이었고 이젠 그마저 밀쳐내기 시작하면서 갈 곳을 잃었습니다. 어떡해야 할까요. 나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2017.07.08.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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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뜨지 않으면 우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달력 대신 차고 기우는 달로 날을 헤아렸다. 계절은 변하지 않을 듯 갑작스레 달라지곤 했다. 옷은 늘 두껍거나 얇았고 밤은 아무리 길어져도 짧았다. 지난 가을엔 장례식에 다녀왔다. 종이 한 장보다 짧아진 계절을 견디지 못해 떠난 이의 얼굴을 보며 나무의 나이테를 세듯 겨울의 횟수를 헤아려 보았다. 사람은 어떻게 지난 시간을 증명하는가. 요즘 나의 관심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증명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 가는데 쌓아 둔 것이 없어 또 하루 부끄러움만 더한다. 보름은 너무 밝아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그믐은 너무 어두워 나를 놓을 뻔했다. 모든 것이 핑계라 여느 밤이라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짧은 밤에도 어둠은 진득한데 나만 쉬이 풀어지곤 했다. 그렇게 주춤거리다 오늘도 밤을 놓쳤다. 자신을 대신할 단어 하나 찾지 못해 또 하나의 달이 바스러진다. 고개를 저어도 한사코 돌아오는 시선이 두려워 하릴없이 어딘가에 누군가를 생각한다. 당신의 평안을 소원한다.

2015.1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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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때린 다음 날엔 어김없이 치킨을 사 오셨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는 듯이. 그러니까 치킨은 아버지의 면죄부이며 엄마와 나의 맷값이었다. 난 시퍼렇게 든 멍이 가려워 몇 번이고 긁으면서도 치킨을 먹으며 맛있다 생각하는 내가 싫었다. 게임 속에서 나는 세상을 구한 용사였는데, 현실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마의 성경책 읽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손에 성경책은 군데군데가 찢겨나갔고, 하릴없이 엄마는 몇 번이고 장을 건너뛰며 읽어야 했다. 얇아지는 성경책만큼 엄마와 나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 그 전날 엄마는 웬일로 나를 불러서는 성경이 아닌 옛날 얘길 해줬다. 엄마가 내 나이 때 어떤 걸 보고 듣고 자랐는지, 뭘 하고 놀았는지, 어떤 만화를 좋아했는지, 평소엔 잘 하지 않던 이야기들을 한가득 들려주었다. 엄마는 나보다 조금 더 큰 소녀들이 변신해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만화를 좋아했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만 다를 뿐 내가 하는 게임과 비슷한 얘기 같았다. 엄마도 어릴 땐 나하고 비슷한 걸 좋아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다 엄마는 말했다. 어릴 때 본 마법 소녀는 주문만 외우면 변신을 하곤 했어. 한껏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사랑과 정의를 말했지. 하지만 현실은 주문을 수만 번 외워도 나아지는 게 없었어. 오히려 점점 더 시궁창으로 떨어지기만 했지. 내가 멍청했어. 사랑과 정의는 다 마법으로만 가능했던 건데, 난 마법 소녀가 아니잖아. 그 뒤로도 엄마는 한참을 더 이야기했고 난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 뒤론 엄마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아침 일찍 집을 나가셨다가 밤늦게 돌아오셨다. 그러곤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집어 던지셨다.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얼마나 더 많은 물건을 부술 수 있나 게임이라도 하시는 것 같았다. 본인이 깬 유리컵 조각을 밟고 피를 흘리기도 하셨다. 그럴 때면 잠시 물건 던지길 멈추고 욕만 하셨다. 그건 또 정해진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욕을 할 수 있나 하는, 그러니까 보너스 게임 같았다. 며칠 전 집을 나간 아버지는 여태껏 돌아오지 않으셨다. 엄마 냄새가 그리워 옷장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엄마 옷은 없었다. 옷걸이들은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바닥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한 개의 옷걸이만이 부끄러움을 참으며 힘겹게 매달려 옷장을 지켰다.

2015.06.27.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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