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다. 요 며칠 해만 지면 햇볕에 달아오른 땅을 급하게 식히려는 듯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밤새 태풍이 몰아치다 다시 해가 뜰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은 사라지고 더위만 가득했다. 해가 떴을 때와 그렇지 않은 시간이 서로 다른 계절인 듯 나뉘었다. 한 시간 남짓 매일 밤 습관처럼 걷는 길. 옆에 선 너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서로의 발을 맞추며 걷는다. 하루의 마지막. 긴 하루일수록 더 행복한, 온전히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시간. 난 언제부턴가 매일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
전철은 언제나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끊겼다. 택시를 타기에는 아까운, 하지만 지친 하루 끝에 걷기엔 부담스러운 거리다. 그럴 때마다 넌 역에서 날 기다렸다. 난 피곤함도 잊은 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네게 떠들어댔고, 넌 내 얘기에 맞장구쳐주며 가끔은 네게 있었던 재밌는 일들을 이야기해주며 나를 바래다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말이 그렇게 실감 날 수 없었다. 힘든 날일 수록 오히려 이 길이 조금 더 길어지길,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이어지길 바랐다. 길을 걸으며 대화를 하는 것이 어딘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집중하게 만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내 발걸음은 조금씩 느려진다. 이별을 앞둔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너와의 헤어짐이 아쉬운 까닭이지만, 넌 내가 지쳤다고 생각했는지 내 발에 맞춰 걷는다. 너의 몸에 베인 크고 작은 배려들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집까지 갈 수 있는 막차를 일부러 타지 않았음을, 너와의 걸음으로 오늘 하루를 끝낼 수 있기를 바랐던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또한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날의 일을 내가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익숙해져선 안 되는 것에 익숙해진 미련한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매일 밤 지독히도 미안해하고 있음을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집이 가까워지고 내 발걸음은 또 한 번 느려진다. 네가 없이 너를 떠올리며 걷는 길.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는 나와, 집에 돌아가면 또다시 찾아올 오지 않는 잠에 뒤척일 깊은 밤과, 아직까지도 내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못난 내 모습에 지친다. 생각해보면 넌 내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을 빼면, 단 한 번도.

2012.06.26.23:24.
이지수 Blue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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