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6.24:18.

2012. 10. 17. 00:18 /2012-

집에 도착하자마자 TV부터 켠다. 딱히 보는 프로가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상황이 싫어서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입었던 옷을 세탁기에 넣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어제 먹던 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반찬 두세 가지를 꺼내 상을 차린다. TV 채널을 몇 번 돌리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멈춘다. 몇 번은 본 회차라 이젠 웃음도 나지 않지만 상관없다. 평소대로 푸면 어설프게 남을 것 같아 밥솥에 있던 밥을 모조리 긁어 담았더니 그릇을 비우기가 영 버겁다. 일 분에도 몇 번씩 쓰러질 듯 웃는 TV 속 사람들을 표정 없이 바라보며 남은 밥을 꾸역꾸역 넘긴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끝낸 뒤 잠시 밥을 안칠까 고민한다. 내일은 집에 몇 시쯤 들어올 수 있을까. 내일모레는,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화요일 밤은 밥을 하기엔 애매하다. 야근이 이어지면 주말에나 먹을 수 있어 새로 밥을 하자니 망설여지고, 비워두자니 허전하다. 결국 일찍 끝나더라도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편이 집에서 쉰밥을 먹는 것보단 낫겠다 싶다. 컴퓨터를 켜려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시간만 죽일 것 같아 그만둔다. 침대에 잠시 누웠다 며칠 전 지하철역에서 산 영화 잡지를 꺼내 편다. 계약서라도 살피듯 꼼꼼히 기사를 읽다 눈에 띄는 개봉작 몇 작품을 발견한다. 지난주에 나온 잡지니 이미 상영 중일 텐데, 주말엔 오랜만에 극장이나 갈까. 아니면 금요일에 심야로 볼까. 한때 영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가 뭐냐, 사내자식이. 이왕 할 거면 감독은 해야지. 대체 사내자식과 영화감독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두 번 다시 아버지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걸 당신은 모르신다. 결국 난 내가 원하던 작가도,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감독도 되지 못한 채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 쪽이 더 치열하고 간절했을까 싶을 만큼 겨우 얻어낸 평범함이었다. 매일 갱신하지 않으면 박탈되는 자격증 같은 평범함. 철봉 게임 같았다. 정해진 시간만큼 철봉에 매달려 있지 못하면 바닥이 꺼져 떨어지는 벌칙을 받는 게임. 새로운 목표는 매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할당되고 게임은 계속된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예능 프로 보듯 보며 웃고 있지 않을까. 맥없이 쓰러지는 나를 보며 일 분에도 몇 번씩 쓰러질 듯이. 매달려 있어야 할 시간이 늘어나며 자연스레 극장에 가긴커녕 컴퓨터나 TV로 영화를 보는 횟수마저 뜸해졌다. 그마저 익숙해지며 이젠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긴 했나 싶다. 잡지를 덮고 멍하니 천장을 보다 뭔가 생각난 듯 컴퓨터를 켠다. 블로그에 비공개로 올렸던 예전 글들을 넘겨보다 멈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수정 버튼을 누르고 열심히 키보드를 치다 방금 쓴 내용을 다시 읽어보곤 모두 지운다. 다시 몇 자 적다가 이내 그 내용마저 지우고는 다시 저장 버튼을 누른다. 나아지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지우기엔 미련이 남아 남겨둔 글들이 블로그에 먼지처럼 쌓였다. 손가락도 아닌 손바닥으로 굴려 뭉치면 밥그릇 하나는 채울 수 있을 만큼 수북이. 다시 다른 글을 읽다 수정 버튼을 눌러 고치나 마나 한 문장 몇 개를 고치고 저장한 뒤 컴퓨터를 끈다. 그러고도 한참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쉰내 나는 밥이 된 기분이다. 물기 없는 밥풀은 잘 붙지도 않는데, 그래서 갈수록 매달리는 일도 힘들어지는 걸까. 문득 시계를 보고 일어나 방에 불을 끈 뒤 침대에 눕는다. 바뀌었을 리 없는 휴대전화 알람을 확인하고 눈을 감는 지금, 가장 두려운 건 내일도 오늘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확신이다.

Mot 서울은 흐림 (Feat. 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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