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ole

2019. 2. 19. 23:54 /2015-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가시광선을 거의 100% 흡수하는 검은 물질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 예술가가 독점하던, 제조 과정이 까다롭다던 이 물질이 어떻게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 기업이 생산권을 독점한 채, 딱 한 공장에서 모든 생산을 도맡아 했지만, 독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품의 가격은 저렴했다. 검은 물질은 다른 물감, 스프레이, 페인트와 같은 형태로 유통되었다. 별다른 포장이나 제품명도 없이 그저 '검은 잉크'라고 적힌 채. 상품 이름이라기엔 지나치게 단순했지만 그 압도적인 검정에 '검은 잉크'는 그 제품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각 분야, 특히 과학계와 예술계, 은밀히는 군사업계에서 이 검은 잉크를 어떻게 사용할지 기대와 우려가 이어졌다.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과학도 예술도, 군사업계도 아닌 SNS였다. 처음엔 구입 인증샷이 이어지더니 곧 검은 잉크를 사용한 후기들이 쏟아졌다.
검은 잉크로 칠한 물건을 들고 사진을 찍어 허공이나 몸에 구멍이 난 듯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 뒤 검은 잉크를 칠한 종이를 들고 있다 그 뒤에서 손이 뚫고 나오거나, 책상이나 바닥에 칠한 뒤 위에 물건을 두거나 사람이 서서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이게 하고, 커다란 벽 하나를 통째로 칠해 이질적인 풍경을 만들거나, 손바닥이나 손등, 몸이나 얼굴에 칠하는 사람도 있었다. 혼자 칠하는 것에 이어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예컨대 익숙한 공간에 갑자기 생긴 구멍을 보고 놀라 발을 피하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게 하거나 거리감을 알 수 없는 점을 이용해 막대기나 기둥을 칠한 뒤 걸려 넘어지거나 부딪히게 하는 영상이 속속 올라왔다. 검은 잉크가 익숙해지며 당연히 잉크를 칠한 거라 생각했지만 실은 진짜 구멍이었다는 식의 반전 영상도 등장했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검은 잉크 관련 게시물엔 #blackhole 태그가 붙었고, 이는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검은 잉크를 이용해 누가 더 기발한 발상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지가 경쟁이 되었고, 그와 함께 크고 작은 구멍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학생 한 명이 맨홀에 빠져 죽으며 장난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되었다. 왜 도로 한가운데 맨홀 뚜껑이 열려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학생이 구멍을 보지 못한 것인지, 보고도 검은 잉크를 칠한 것이라 생각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언론이 '검은 잉크로 만든 구멍과 착각해 맨홀에 떨어져 숨진 학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하며 사람들은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검은 잉크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연일 보도되었다. 지금까지는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는 듯, 알지만 말해선 안 되는 비밀이었다는 듯, 학생의 추락사 이전에 벌어졌던 사고들까지 쏟아져나왔다. 벽에 칠한 검은 잉크를 주차장 입구와 혼동해 차로 들이박은 사건이나, 진짜 구멍인 줄 알고 급하게 핸들을 틀다가 혹은 보행 중 넘어져 다친 사고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맨홀 추락사를 접한 뒤 사람들은 구멍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이용해 보행 중 진짜 구멍인지 검은 잉크인지 구분할 때 쓰라며 지팡이를 판매하는 곳이 생겨났다. 아직 안전성이 완벽히 검증되지 않은 물질이라며 판매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검은 잉크를 몸에 칠했다가는 피부암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하는 의사가 방송국을 옮겨 다니며 같은 말을 반복했고, 어째서 이런 위험한 물질이 판매되도록 방치한 것이냐며 정부를 탓하는 정치인과 검은 잉크로 인해 발생한 사고의 책임은 잉크를 칠한 사람과 방치한 사람, 판매, 생산한 사람이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의견을 제시하는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잉크를 손바닥 크기보다 크게 칠하면 안 되며, 벽과 바닥에는 아예 칠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곳곳에 붙었다. 국회에서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관련 법안 제출이 줄을 이었다. 그 많은 법안 어디에도 그럼 검은 잉크를 어디까지 금지해야 하는지, 이미 생산, 판매된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고민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종교계는 검은 잉크가 빛을 지우고 사람을 현혹하는 사탄의 물질이라 했다. 사용은 물론 생산도 중단해야 한다며, 검은 잉크의 제조 회사와 공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이미 칠해진 검은 잉크를 지우기 위해 많은 사람이 투입됐다. 하루에도 수만, 수십만 개의 구멍이 닫혔다.
지금까지의 여러 일과 마찬가지로, 그 사고가 고의인지 과실인지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이미 무언가를 밝히기엔 늦었지만, 검은 잉크를 만들던 공장에서 유출 사고가 났다. 정확히는 폭발이었지만 유출의 영향이 훨씬 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배송 관과 보관 탱크가 터졌다. 보관 탱크에서 검은 잉크가 터져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흘렀고, 폭발과 함께 위로 기운 배송 관으로 검은 잉크가 계속 유입되며 하늘 높이 뿜어져 올랐다.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검은 잉크가 공장은 물론 주변 건물 일부를 뒤덮은 뒤에야 사고를 수습할 수 있었다. 수습이라기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뒤였다. 그동안 검은 잉크로 만든 수많은 구멍 사진이 SNS에 올라왔지만 이렇게 거대한 건 없었다. 고스란히 드러난 건물의 실루엣이 정교한 구멍이 되어 우뚝 솟았다. 발 빠른 방송국 관계자가 드론부터 띄웠다. 드론에 달린 카메라는 공장지대 가운데 생긴 거대한 구멍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blackhole이었다. 앞다투어 방송국이 속보를 전하던 그때, 공장 안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온몸에 검은 잉크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구멍에서 팔다리를 하나씩 꺼내듯 걸어 나왔다. 허공에 하얀 눈동자만 떠 있는 사람들이 거대한 구멍 한가운데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어떤 의미에선 더 없이 종교적이었다.
이날 유출된 검은 잉크는 지워지지 않았다. 중화가 덜 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많은 양에 노출되어서인지 공장은 물론 사람들에 묻은 잉크 모두 지워지지 않았다. 보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은 말이 오갔고, 피부과와 성형외과 의사들이 모여 피부를 벗겨내면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피부를 이식하는 건 어떨까, 색소 치료를 반복하는 건, 새로운 잉크를 만들어 덧칠하는 건, 등 여러 진단을 내놓았지만 소용이 없거나 현실성이 없었다. 밤에도 눈에 띌 정도로 선명한 색이라, 검은 잉크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투명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 장갑과 마스크, 선글라스 등을 쓰듯, 이들도 온몸을 가려야 했다. 한 언론사에서 이들의 피해 상황을 취재한 뒤 '검게 변한 노동자, 산 채로 죽은 이들'이라는 기사를 냈다. 검은 인간, 걸어 다니는 구멍, 인간 구멍 등 희화화와 동정 어린 시선이 뒤섞인 댓글이 달렸고, 이튿날, 한 아파트 단지 가운데엔 붉은 피를 흘리는 사람 모양의 구멍이 생겼다.
검은 잉크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아무 대책 없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공장은 '현대 사회의 거대한 공허를 드러낸 작품 같다'는 한 유명 평론가의 말과 함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안전 정비를 마친 공장은 관광지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거대한 공허' 가운데서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좌절하기도, 신비로워하거나 들뜨기도, 손을 잡은 사람과의 연대나 홀로 떨어진 고독감을 절실히 느끼기도 했다. 이유와 감상은 모두 달랐지만 공장의 현장감은 분명 압도적이었고, #blackhole은 공장 방문을 인증하는 사진에 붙는 태그로 바뀌었다. 공장 안 한 편에는 생산설비를 정리해 놓은 공간이, 한 편에는 사고로 인간 구멍이 된 사람들을 대신하는, 검은 잉크를 쓴 마네킹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손가락 하나 크기부터 팔뚝 크기까지, 검은 잉크로 칠한 공장 혹은 사람 모형을 팔았다. 외국인이 줄을 서가며 방문하는 유명 관광지 하나 없던 나라에, 처음으로 거대한 테마파크가 생겼다.
매일 수만 수십만 명이, 현대 사회의 거대한 공허 위를 걷고 만졌다.

2018.12.21.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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