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소리 내 말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이 열 글자에는, 반짝임만큼의 절망이 담겨 있다.
고민이 있어 술 한 잔하고 싶은데 괜찮냐는 물음에 넌 당연하다며, 당장 내일 보자고 말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어 만난 우린,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볍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 술이 나오고 나서야 난 그 사람 얘기를 꺼냈다.
몇 달 됐어. 알고 지낸 지는 꽤 됐는데, 한동안 연락 못하다가 얼마 전에 다시 만났거든. 예전엔 아무 감정 없었는데 다시 보니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떨리는 거야. 처음엔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워 그런 줄 알았는데, 그 뒤로 계속 연락하면서 가끔 얼굴보다 보니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더라.
연락도 계속하고 가끔 만나기도 했어? 그럼 그쪽도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아냐?
아닌 것 같아. 그 사람은 그냥 친구 대하듯 하거든.
아냐, 남자들은 마음 없는 사람한테는 연락도 안 하고 만나지도 않는다잖아. 먼저 연락 오거나 그러진 않고?
그냥 가끔.
주로 무슨 얘기 해? 만났을 땐 뭐하고?
다 비슷하지 뭐. 요즘 무슨 일 있었는지, 뭐 재밌거나 힘든 일은 없는지, 그런 얘기하고. 만나면 영화 보고, 밥 먹고, 카페 가거나 가끔 술 한 잔하고.
둘이 술도 마셔? 얘기만 들으면 썸도 아니고 이미 사귀는 사인데?
아냐 진짜. 그냥 친구 같다니까. 너하고 별반 다를 거 없어.
남녀 사이는 다르지. 그 사람도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너무 둔한 거 아니고? 그쪽에서 표현한 적은 없어? 손을 잡는다거나 뭐 그런 거.
전혀. 그리고 나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닌 거 알잖아.
모르지, 눈치 빠른 사람도 정작 본인 일엔 둔하고 그렇잖아.
진짜 아냐, 아무 표현도 없었어.
분명 뭐가 있는데. 아니면 네가 너무 내색을 안 해서 그 남자도 조심스러운 걸 수도 있고. 네가 먼저 티를 내 보는 건 어때?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뭔 소리야, 사람 좋아하는데 그런 게 어딨어. 요즘은 나이나 국적도 안 따지고 잘만 만나던데.
그렇긴 한데.
뭔가 문젠데? 여자 친구 있는 사람이야? 아니면 유부남?
아냐 그런 거.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말하면 안 될 거 같아.
끝내 너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만난 곳은 고등학교 동창회였다. 얼마 전 너와 몇 년 만에 만난 그 자리에서 난 그 사람을 만났다. 차라리 그 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난 몇 번이고 후회했다.
너는 모른다. 말을 하면 할수록 너와 내가 다른 세상에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는 걸. 그럴수록 난 더 죄를 짓는 것 같고, 계속해서 내게 '그 남자'라 말하는 네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넌 모른다.

2015.04.22.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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