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좀처럼 틀지 않던 전기 스토브를 켰다. 방이 온기가 돌길 기다리며 포트에 물을 데워 따뜻한 차까지 마셔보았지만 몸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냉기로 가득 찬 풍선 하나를 집어 삼킨 듯 몸 안에 빈 공간이 느껴졌다. 가슴 정 가운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깊이에 손바닥 두 개가 위아래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 정확한 위치와 그려 보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느낌이었다. 큰 수술을 하며 몸에 구멍을 냈던 사람들은 전보다 더 춥게 느끼곤 한다는데, 그새 작은 구멍이라도 생긴 걸까. 다급하게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내던 스토브는 목표 온도를 달성한 뒤 조금씩 움직임이 더뎌졌다. 코끝으로 드는 숨은 확연히 따뜻해졌지만 몸 안으로 스미지 못한 채 쫓겨나듯 밖으로 나갔다.

답장은 하지 않아도 돼. 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이었다. 넌 늘 다음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답장 기다릴게, 라는 말을 어쩜 매번 그렇게 돌려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너의 끝인사는 매번 다른 문장이었다. 동시에 그건 네가 다시 편지할 거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답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너의 말이 정확히는 답장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네 편지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뜻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왜 우편으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메시지까진 아니더라도 이메일도 있는데. 주고 받는 사이에 시간이 생기니까, 여백이 없는 건 뭔가 불편하더라고.

여백, 행간, 채워지지 않은 채 남은 무엇. 네가 좋아했던 것들이 난 어렵기만 했다. 왜 의사소통 사이에 굳이 빈 공간을 만드는 걸까. 더 정확히 빠르게 할 수 있는 말을 왜 애둘러 시간을 두고 전하는 걸까. 왜 더 채우면, 가까워지면 안 되는 걸까.

너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날, 난 답장 대신 너의 집을 찾았다. 너라면 분명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그러니까 내가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떠났을 것이다. 알고 있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백이니 행간이니 하더니, 마지막엔 혼자 주석을 붙이다니. 빈 집이라도 찾아가 너무 비겁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짐은커녕 그 흔한 옵션용 가구 하나 없이 방은 고스란히 맨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엌 공간과 화장실까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지만 벽지 곳곳엔 아직 낫지 않은 상처처럼 오래도록 물건을 둔 흔적이 남아있었다. 매트리스가, 책상이, 작은 책장과 수납장, 옷걸이와 벽에 기대어 놓고 쓰던 거울이 있던 자리까지. 얼마 전까진 누군가 여기 살았다는 걸 입을 모아 증언이라도 하듯 빛이 덜 바란 벽지들이 네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겨우 며칠 비워둔 걸텐데 바닥은 한 번도 온기를 뗀 적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 이대로 두면 동파할텐데, 방 주인은 와보긴 한 걸까. 싱크대에 물을 틀자 짧디 짧은 겨울 잠을 끝낸 수도꼭지가 몇 번의 기침 끝에 물을 쏟아냈다. 동파하는 것보단 낫겠지. 간신히 흐를 만큼만 물을 뱉어내는 수도꼭지를 한참 바라봤다.

가구와 더 이상 쓰지 않을 생활용품을 치우고, 자잘한 짐을 정리하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많던 화분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누구에게 갔을까. 책은 중고서점에 팔았을까, 아니면 폐지와 함께 내놓았을까. 혹시 모를 마지막 순간은 누구에게 부탁했을까. 왜 그 사이 한 번도 연락하지 않다가 이제야 편지를 보낸 걸까. 너에게 마지막 편지가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는 내게, 넌 왜 끝까지 물음표만 찍게 한 걸까.

네가 남긴 진짜 주석은 편지가 아니라 방이었다. 편지만 읽었다면, 굳이 마지막 문장에 담긴 뜻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애써 확인하고 답답해하는 건 하릴없이 내 몫이었다. 넌 그걸 알기에 편지를 보냈겠지. 아무도 읽지 않은 문장엔 행간 같은 건 생기지 않으니까. 끝까지 네 독자는 나 하나였으니까.

프레임도 없이 매트리스만 놓였던 자리에 주저앉아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한껏 짧아진 햇볕에도 텅 빈 방을 부유하는 먼지는 잘못 켜진 연말 장식처럼 반짝였다. 얼마 전 이순신 장군이 내쉬었던 숨이 지금도 남아있을 확률에 대해 해 한 과학자가 이야기하는 영상을 본 적 있다. 전설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이순신 장군의 숨결도 아직 남아있을 수 있다는데, 며칠 전 떠난 네 숨결쯤이야 훨씬 더 많이 남았겠지. 이 방이 네가 남긴 주석이라면, 어떤 여백도 없이 내 몸 가득 채우고 싶었다. 가구에 가려 그동안 본 적 없던 깨끗한 벽과 경계, 미세하게 긁힌 바닥 자국, 착각에 가까운 미약한 체취,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하지만 분명 네가 남긴, 이 방이 기억하는 사사로운 모든 것.

차갑고 텅 빈 방 한 켠에서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집주인이든 방을 보러 온 사람이든, 누구라도 갑자기 들어온다면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문을 닫고 나오면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환승을 하기 위해 내려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서 문득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춥다, 생각했다. 한기는 손끝과 귀부터 시작해 빠르게 온 몸을 덮쳤다. 추위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잠깐 꺼져 있던 전원이 서서히 켜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난방부터 켰지만 몸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내가 집어삼킨 풍선은 얼마나 오래 부피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조심해 봐야 겨우 풍선인데, 바람이 빠져 작아진 뒤엔 어떻게 널 채울 수 있을까. 네가 보낸 편지들을 꺼내 하나씩 다시 읽었다. 그새 조금 작아진 풍선에 다시 바람을 밀어 넣기를 한참. 과속방지턱 앞에서 급하게 속도를 줄이는 자동차럼 마지막 편지에 이르러 멈칫했다. 답장은 하지 않아도 돼. 결말은 바뀌지 않았고, 밀어 넣었다 생각한 바람은 풍선 주변만 맴돌다 맥 없이 흩어졌다.

노트북을 켜 언제 마지막으로 실행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문서 프로그램을 틀었다. 가만히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너의 이름을 적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삿말을 썼다. 그리곤 신기할 정도로 오래,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난 너에게 참 많은 얘길 했는데,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아직 한 번도 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아무도 읽지 않을 문장이라 행간이고 의미고 어떤 것도 생기지 않겠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었다. 네가 남긴 물음표에 길고 긴 답을 다는 건 언제나 나의 일이었으니까. 네가 그랬듯 내게도 마지막 주석이 필요하니까. 이번엔 정말 어떤 여백도 틈도 없이 빼곡하게, 너의 행간을 메워야겠다.

2022.12.26.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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