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중

2023. 11. 29. 23:32 /2015-

오래 전 문을 닫은 작은 슈퍼 앞, 지나가는 사람조차 드문 이곳에 이젠 마실 수도 없어진 음료 캔들을 가득 끌어안은 채 홀로 서 있다.

분명 여기 오기 전, 하다못해 오던 날의 기억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마치 여기서 조립되어 처음 전원이 켜진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건 이곳의 풍경뿐. 해와 달이 뜨고 지고, 비나 눈이 내리고, 일 년에 몇 번인지 셀 수 있을 만큼 적게 사람이 오가는, 신기할 정도로 달라지지 않는 골목 어귀를 하릴없이 바라본다.

아주 오래 전, 처음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누군가 나를 찾아오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돼 제대로 작동할 자신도 없다. 그 와중에 선명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판매중’ 붉은 세 글자는 낙인 같기만 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다. 몸 안에 캔을 다 비우면 이 글자도 꺼질까. 스스로 마셔 없앨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끌어 안은 건 물론 내 몸의 일부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음료를 넣어주던 사람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아니 처음 내 몸에 불을 켠 사람은 나를 왜 여기 둔 걸까. 기억하지 못할 뿐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까. 지금은 문을 닫은 슈퍼도, 한 때는 손님으로 붐비던 때가 있었을까. 아마 나를 켠 사람은 이 슈퍼의 주인이었을 텐데, 가게는 문을 닫았으면서 왜 나는 끄지 않은 걸까. 홀로 버틸 수 있다 생각했을까. 내가 쓰는 전기가 아깝지도 않나. 내가 켜져 있는 걸 알긴 할까.

하루의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다면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갔을 텐데. 조금이라도 사람이 더 오가는 곳으로 가거나, 아직 문 닫지 않은 가게 앞으로 가거나, 골목이라도 벗어나거나, 적어도 방향이라도 틀어서 다른 풍경이라도 보았을 텐데.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할 수 없는 일을 갈망했다. 그때부터 시간은 점점 더 더디게 흘렀고 흔들릴 리 없이 몸 안에 음료 캔들이 자꾸만 덜그덕거리며 나를 탓했다.

사실 난 자판기가 아니라 가로등이 아닐까. 제대로 작동하는 거라곤 전면부에 달린 작은 형광등 몇 개가 전부다. 불빛 아래 음료 캔은 아무 의미가 없고, 난 그저 해가 진 뒤 좁은 골목에 더 좁은 주변만 밝히고 서 있다. 지폐든 카드든 어떻게든 결제를 하고 음료 캔을 내어 본 기억은 까마득하기만 한데, 어쩌면 그건 기억이 아니라 꿈이나 상상이었나 보다. 스스로를 자판기라 착각한 가로등의 망상 같은. 끌어 안고 있다고 생각한 건 음료 캔이 아니었고, '판매중'이라는 세 글자를 밝힌 적도 없고, 모두 내 착각이거나 혹 있더라도 누군가의 실수, 아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인테리어의 일부라고. 시간이 더 흘러, 아니 당장이라면 불이 꺼진다면 나는 무엇이 될까. 가로등도 아니고, 마실 수 없게 된 음료 캔만 가득 끌어안은 채 ‘판매중’이라며 책임질 수 없는 말만 반복하는 네모낳고 거대한 캔이 된 나는, 무엇일까.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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