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뜨지 않으면 우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달력 대신 차고 기우는 달로 날을 헤아렸다. 계절은 변하지 않을 듯 갑작스레 달라지곤 했다. 옷은 늘 두껍거나 얇았고 밤은 아무리 길어져도 짧았다. 지난 가을엔 장례식에 다녀왔다. 종이 한 장보다 짧아진 계절을 견디지 못해 떠난 이의 얼굴을 보며 나무의 나이테를 세듯 겨울의 횟수를 헤아려 보았다. 사람은 어떻게 지난 시간을 증명하는가. 요즘 나의 관심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증명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 가는데 쌓아 둔 것이 없어 또 하루 부끄러움만 더한다. 보름은 너무 밝아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그믐은 너무 어두워 나를 놓을 뻔했다. 모든 것이 핑계라 여느 밤이라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짧은 밤에도 어둠은 진득한데 나만 쉬이 풀어지곤 했다. 그렇게 주춤거리다 오늘도 밤을 놓쳤다. 자신을 대신할 단어 하나 찾지 못해 또 하나의 달이 바스러진다. 고개를 저어도 한사코 돌아오는 시선이 두려워 하릴없이 어딘가에 누군가를 생각한다. 당신의 평안을 소원한다.

2015.1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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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때린 다음 날엔 어김없이 치킨을 사 오셨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는 듯이. 그러니까 치킨은 아버지의 면죄부이며 엄마와 나의 맷값이었다. 난 시퍼렇게 든 멍이 가려워 몇 번이고 긁으면서도 치킨을 먹으며 맛있다 생각하는 내가 싫었다. 게임 속에서 나는 세상을 구한 용사였는데, 현실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마의 성경책 읽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손에 성경책은 군데군데가 찢겨나갔고, 하릴없이 엄마는 몇 번이고 장을 건너뛰며 읽어야 했다. 얇아지는 성경책만큼 엄마와 나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 그 전날 엄마는 웬일로 나를 불러서는 성경이 아닌 옛날 얘길 해줬다. 엄마가 내 나이 때 어떤 걸 보고 듣고 자랐는지, 뭘 하고 놀았는지, 어떤 만화를 좋아했는지, 평소엔 잘 하지 않던 이야기들을 한가득 들려주었다. 엄마는 나보다 조금 더 큰 소녀들이 변신해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만화를 좋아했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만 다를 뿐 내가 하는 게임과 비슷한 얘기 같았다. 엄마도 어릴 땐 나하고 비슷한 걸 좋아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다 엄마는 말했다. 어릴 때 본 마법 소녀는 주문만 외우면 변신을 하곤 했어. 한껏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사랑과 정의를 말했지. 하지만 현실은 주문을 수만 번 외워도 나아지는 게 없었어. 오히려 점점 더 시궁창으로 떨어지기만 했지. 내가 멍청했어. 사랑과 정의는 다 마법으로만 가능했던 건데, 난 마법 소녀가 아니잖아. 그 뒤로도 엄마는 한참을 더 이야기했고 난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 뒤론 엄마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아침 일찍 집을 나가셨다가 밤늦게 돌아오셨다. 그러곤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집어 던지셨다.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얼마나 더 많은 물건을 부술 수 있나 게임이라도 하시는 것 같았다. 본인이 깬 유리컵 조각을 밟고 피를 흘리기도 하셨다. 그럴 때면 잠시 물건 던지길 멈추고 욕만 하셨다. 그건 또 정해진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욕을 할 수 있나 하는, 그러니까 보너스 게임 같았다. 며칠 전 집을 나간 아버지는 여태껏 돌아오지 않으셨다. 엄마 냄새가 그리워 옷장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엄마 옷은 없었다. 옷걸이들은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바닥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한 개의 옷걸이만이 부끄러움을 참으며 힘겹게 매달려 옷장을 지켰다.

2015.06.27.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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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 커피를 마시고 그만큼의 잠을 접어 둔다. 며칠이 되지 않아 잠은 한 권의 책이 된다. 책이 된 잠을 책장에 꽂는다. 커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책장에 꽂힌 잠은 조금도 허투루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나를 기다린다. 틈틈이 쌓인 잠을 한 권씩 꺼내어 풀어 보낸다. 허나 책은 사라지는 것보다 빠르게 늘어만 간다. 몇 달의 한 번, 제 몸이 버거워진 책장은 내게 책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그 아래 깔린 난 어떻게도 일어날 수가 없다. 책이 되었던 잠은 다시 반투명한 관이 된다. 난 그저 쌓인 잠이 흘러가길 기다리며 바닥에 낮게 엎드려 있을 뿐이다.
간신히 빈 책장을 치우고 일어나면 사라진 잠만큼 낯선 시간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뺨을 때리고 발목을 잡아끌며, 때론 소매 끝에 매달려 나를 불편하게 한다. 시간은 언제나 남이었다. 낯설게 다가와 냉정하게 지나간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추억하는 건 나뿐이다. 늘 곁을 스쳐가면서도 나와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다. 내겐 시간이 그렇다. 아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매정할 순 없다. 하루만큼 죽어간다. 커피를 마시거나 잠을 자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다. 어쩔 수 없이 쌓인 잠을 비워내야 하는 것처럼 매순간 죽음은 내게 다가온다. 아니 죽음을 향해 내가 떨어져 간다. 어쩌면 계속해서 쌓이는 잠의 본질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접히고 책이 되어 책장을 메우고 하나의 벽을 가리면서 잠은 점점 더 뚜렷한 죽음이 된다. 반투명했던 관이 선명해진다. 나를 덮치는 것은 결국 죽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다가가고 있는 그것이다. 오늘도 방 깊은 곳에 새로운 책을 한 권 꽂는다.

2014.11.08.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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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잊을 만도 한데, 이맘때만 되면 여자는 어김없이 이 문장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히 떠오르는 일도 없다.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여자를 사로잡으며 그녀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켰다.
사람들은 그녀가 어렵다 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이라 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그녀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어려웠다. 어쩌면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여자는 무서웠다. 저 사람은 아직 나를 모른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보다 나를 잘 알게 되면 틀림없이 멀어질 것이다. 버림받을 것이 분명하다. 비슷한 일을 겪은 기억이 없음에도, 자신의 생각이 막연한 공포라는 걸 알면서도 여자는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여자를 매사에 초조하게 했다.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여자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거나 빚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을 혹사시키면서라도 어떻게든 맡은 일에서,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애썼다. 능력은 모든 것을 긍정한다 했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 받을 수 없다면 일에서라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과 몸 중 어느 쪽이 먼저 망가지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무리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여자는 수시로 앓아눕곤 했다. 몸이 아픈 것보다 누구에게 아픈 티 한 번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그녀의 외로움은 짙어만 갔다.
결국 사람들과 먼저 멀어진 것은 여자였다.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있어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늘 버림받기 전에 천천히 멀어지는 쪽을 택했다. 몇 번의 만남을 거절하고, 한동안 연락을 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번의 계절, 가까워지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든, 멀어지는 데는 늘 그 정도만 필요했다. 그렇게 여자는 시간을 거리로 두기 시작했다. 나아지는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안 좋아지는 것 또한 없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또 한 번의 이별을 앞두고, 여자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을 읊조려본다.

2013.10.03.26:22.
이소라 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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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누구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널 알아갈수록 내 의문은 깊어진다. 넌 진정 날 사랑하는 걸까.
고백을 앞두고 내가 두려웠던 건 거절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승낙. 차마 거절하는 것이 미안해 알겠다고 할까봐, 단지 그 이유로 날 만나고, 후에 네가 날 떠올렸을 때 느끼는 감정이 오직 미안함뿐일까봐 난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누군가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라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네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치졸한 이기심에 난 네게 고백했다. 그렇게 너와 내가 만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한다 말할 때면 너 역시 사랑한다 했다. 한 번도 네가 먼저 사랑을 말한 적은 없었다. 다툼은 언제나 너의 사과로 끝이 났다. 나의 작은 투정에도 넌 늘 미안하다고 했기에 다툼이라 조차 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한 번은 내 스스로 분에 못 이겨 넌 왜 늘 미안하다는 말뿐이냐고,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왜 이렇게 사람이 착하기만 하냐고, 날 사랑해서 만나긴 하는 거냐고 쏘아댔다. 난 네가 화를 내거나, 아니면 최소한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며 지친 기색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넌 모든 것이 미안하다며 사랑한다고, 날 사랑한다고 말했다. 결국 넌 또 미안할 뿐이었다.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렵게 털어놓은 내 얘기에 친구들은 그렇게 미련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 어디 있냐고 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넌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고도 남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너의 진심을 의심하는 내가 밉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울 수가 없다.
헤어지자는 말을 앞두고 난, 네가 차마 거절하는 것이 미안해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할까봐, 시작이 그랬듯 마지막까지 너에게 그저 미안함뿐인 사람으로 남을까봐 두렵다.

2013.03.27.28:42.
Birdy Skinny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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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6.24:18.

2012. 10. 17. 00:18 /2012-

집에 도착하자마자 TV부터 켠다. 딱히 보는 프로가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상황이 싫어서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입었던 옷을 세탁기에 넣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어제 먹던 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반찬 두세 가지를 꺼내 상을 차린다. TV 채널을 몇 번 돌리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멈춘다. 몇 번은 본 회차라 이젠 웃음도 나지 않지만 상관없다. 평소대로 푸면 어설프게 남을 것 같아 밥솥에 있던 밥을 모조리 긁어 담았더니 그릇을 비우기가 영 버겁다. 일 분에도 몇 번씩 쓰러질 듯 웃는 TV 속 사람들을 표정 없이 바라보며 남은 밥을 꾸역꾸역 넘긴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끝낸 뒤 잠시 밥을 안칠까 고민한다. 내일은 집에 몇 시쯤 들어올 수 있을까. 내일모레는,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화요일 밤은 밥을 하기엔 애매하다. 야근이 이어지면 주말에나 먹을 수 있어 새로 밥을 하자니 망설여지고, 비워두자니 허전하다. 결국 일찍 끝나더라도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편이 집에서 쉰밥을 먹는 것보단 낫겠다 싶다. 컴퓨터를 켜려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시간만 죽일 것 같아 그만둔다. 침대에 잠시 누웠다 며칠 전 지하철역에서 산 영화 잡지를 꺼내 편다. 계약서라도 살피듯 꼼꼼히 기사를 읽다 눈에 띄는 개봉작 몇 작품을 발견한다. 지난주에 나온 잡지니 이미 상영 중일 텐데, 주말엔 오랜만에 극장이나 갈까. 아니면 금요일에 심야로 볼까. 한때 영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가 뭐냐, 사내자식이. 이왕 할 거면 감독은 해야지. 대체 사내자식과 영화감독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두 번 다시 아버지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걸 당신은 모르신다. 결국 난 내가 원하던 작가도,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감독도 되지 못한 채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 쪽이 더 치열하고 간절했을까 싶을 만큼 겨우 얻어낸 평범함이었다. 매일 갱신하지 않으면 박탈되는 자격증 같은 평범함. 철봉 게임 같았다. 정해진 시간만큼 철봉에 매달려 있지 못하면 바닥이 꺼져 떨어지는 벌칙을 받는 게임. 새로운 목표는 매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할당되고 게임은 계속된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예능 프로 보듯 보며 웃고 있지 않을까. 맥없이 쓰러지는 나를 보며 일 분에도 몇 번씩 쓰러질 듯이. 매달려 있어야 할 시간이 늘어나며 자연스레 극장에 가긴커녕 컴퓨터나 TV로 영화를 보는 횟수마저 뜸해졌다. 그마저 익숙해지며 이젠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긴 했나 싶다. 잡지를 덮고 멍하니 천장을 보다 뭔가 생각난 듯 컴퓨터를 켠다. 블로그에 비공개로 올렸던 예전 글들을 넘겨보다 멈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수정 버튼을 누르고 열심히 키보드를 치다 방금 쓴 내용을 다시 읽어보곤 모두 지운다. 다시 몇 자 적다가 이내 그 내용마저 지우고는 다시 저장 버튼을 누른다. 나아지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지우기엔 미련이 남아 남겨둔 글들이 블로그에 먼지처럼 쌓였다. 손가락도 아닌 손바닥으로 굴려 뭉치면 밥그릇 하나는 채울 수 있을 만큼 수북이. 다시 다른 글을 읽다 수정 버튼을 눌러 고치나 마나 한 문장 몇 개를 고치고 저장한 뒤 컴퓨터를 끈다. 그러고도 한참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쉰내 나는 밥이 된 기분이다. 물기 없는 밥풀은 잘 붙지도 않는데, 그래서 갈수록 매달리는 일도 힘들어지는 걸까. 문득 시계를 보고 일어나 방에 불을 끈 뒤 침대에 눕는다. 바뀌었을 리 없는 휴대전화 알람을 확인하고 눈을 감는 지금, 가장 두려운 건 내일도 오늘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확신이다.

Mot 서울은 흐림 (Feat. 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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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는 어김없이 감기와 함께 왔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남자는 봄과 가을만 되면 감기를 앓았다. 신기할 정도로 평일엔 괜찮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콧물이 흐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만큼 티가 나진 않았다. 그러다가 꼭 휴일만 되면 흔들었던 탄산음료의 뚜껑을 열듯 감기 기운이 폭발했다. 별로 심각하단 생각 없이 잠이 들었다가도 아침이면 몸살 기운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겨웠다. 씻기는커녕 종일 밥조차 먹지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하루 이틀을 보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자신이 아픈 걸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휴일이 아니라면 직장 동료에게 빈말이라도 어디 아파요? 한마디 들을 수 있을 텐데.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아프단 얘길 먼저 하거나 SNS에 글을 올리는 것도 괜스레 민망해 남자는 혼자 끙끙대며 감기와 싸워야 했다. 종일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릴 때면 남자는 감기 기운이 아닌 외로움에 더 힘들곤 했다. 아플 때 가장 먼저 연락해 아프다고 징징댈 수 있는 사람. 걱정할까 봐 아프다는 말은 못 하고 쓸데없는 말만 돌려하다가 감기 조심해, 한 마디 하고 전화를 끊을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니 그저 더는 혼자 아픈 일이 없었으면.
남자는 또 한 번 홀로 감기를 앓고 있다. 가을이다.

2012.09.1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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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추위에 몸을 떨다 눈을 떴다. 실내엔 아무런 조명도 없었다. 형광등이 천장에 줄지어 매달려있었지만 어느 하나 불이 켜져있지 않았다. 왼편 창으로 담 너머에 세워진 가로등과 도로를 지나는 차의 불빛이 비춰 남자는 간신히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높은 천장과 고스란히 드러난 철골, 세 줄로 길게 매달린 형광등, 투박하게 늘어선 전선과 장판 없이 페인트만 대충 칠해진 바닥, 조립식 벽으로 막힌 오른쪽 벽과 예닐곱 명은 동시에 오갈 수 있을 듯 넓은 문, 학교 교실 세 개는 합쳐놓은 듯 넓은 공간이었다. 아, 공장이구나.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있는 곳을 깨달았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내놓으라할만큼 유명한 브랜드의 기타 공장이었다. 두 달 가량 아르바이트를 해 기타를 장만한 스무 살 청년이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첫 번째 기타를 자랑하며 락은 저항이라고 큰 소리 칠 때, 남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일해야 했다. 공장의 창문은 모두 막혀있었다. 높으신 누군가가 일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알 수 없도록 바깥을 보지 못하게 모든 창을 막아버렸다. 몇 시간에 한 번, 담배라도 한 개비 피우기 위해 밖에 나가야만 하늘이 밝고 어두움을 알 수 있었다.
공장의 소음 속에서 기타가 만들어졌다. 기타를 만드는 곳이었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들은 소음 때문에 귀마개를 해야 했다. 남자는 그때 공장이 내는 소리를 울음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남자는 알았다. 그때 공장은 그저 자신의 소리를 내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귀를 막아야할 만큼 시끄러웠지만 그때의 소리엔 힘이 있었다. 속을 들어내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자 공장은 정말 울기 시작했다. 창이 막혔는데 밤은 어찌 아는 지, 공장은 밤마다 자신의 남은 뼈 속에서 바람을 굴리며 울었다. 공장의 진짜 울음소리를 들으며, 내쫓기고 죽어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님을 남자는 깨달았다.
해고는 빠르게 이뤄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기도 전에 남자를 비롯한 모두가 해고 통보를 받았고, 공장은 하루 아침에 가동이 중단되었다. 며칠만에 생산장비는 모두 차에 실려 어딘가로 떠났고 공장은 텅 빈 속을 드러내야했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본사 앞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에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공장에서. 이들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며 목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정작 이 소리를 들어야했던 사장은 귀를 막은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누군가는 사장을 욕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남자를 비롯해 시위를 하는 해고 노동자들을 욕했다. 남자는 누가 옳은 것인지, 사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저 사람들은 왜 우리를 욕하는 건지, 혹시 자신이 정말 욕먹을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비롯해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왜 잘려야 했는지, 이 공장이 왜 문을 닫아야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기에, 누구도 납득할만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남자는 이곳에 남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여전히 남자는 밤에 눈을 뜰 때면 이곳이 낯설었다. 텅 비어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 하는 공장이, 이곳에서 잠이 들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자신이, 이제 곧 6년이 되어 가는데 그 긴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 지리멸렬한 상황이 너무 낯설고 무서웠다. 팽팽하던 기타 줄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 할 정도로 느슨하게 풀어졌다. 이대로 두 번 다시 악기가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남자는, 공장은 두렵다.

2012.07.21.05:15.
Radiohead Exit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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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다. 요 며칠 해만 지면 햇볕에 달아오른 땅을 급하게 식히려는 듯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밤새 태풍이 몰아치다 다시 해가 뜰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은 사라지고 더위만 가득했다. 해가 떴을 때와 그렇지 않은 시간이 서로 다른 계절인 듯 나뉘었다. 한 시간 남짓 매일 밤 습관처럼 걷는 길. 옆에 선 너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서로의 발을 맞추며 걷는다. 하루의 마지막. 긴 하루일수록 더 행복한, 온전히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시간. 난 언제부턴가 매일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
전철은 언제나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끊겼다. 택시를 타기에는 아까운, 하지만 지친 하루 끝에 걷기엔 부담스러운 거리다. 그럴 때마다 넌 역에서 날 기다렸다. 난 피곤함도 잊은 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네게 떠들어댔고, 넌 내 얘기에 맞장구쳐주며 가끔은 네게 있었던 재밌는 일들을 이야기해주며 나를 바래다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말이 그렇게 실감 날 수 없었다. 힘든 날일 수록 오히려 이 길이 조금 더 길어지길,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이어지길 바랐다. 길을 걸으며 대화를 하는 것이 어딘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집중하게 만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내 발걸음은 조금씩 느려진다. 이별을 앞둔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너와의 헤어짐이 아쉬운 까닭이지만, 넌 내가 지쳤다고 생각했는지 내 발에 맞춰 걷는다. 너의 몸에 베인 크고 작은 배려들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집까지 갈 수 있는 막차를 일부러 타지 않았음을, 너와의 걸음으로 오늘 하루를 끝낼 수 있기를 바랐던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또한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날의 일을 내가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익숙해져선 안 되는 것에 익숙해진 미련한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매일 밤 지독히도 미안해하고 있음을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집이 가까워지고 내 발걸음은 또 한 번 느려진다. 네가 없이 너를 떠올리며 걷는 길.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는 나와, 집에 돌아가면 또다시 찾아올 오지 않는 잠에 뒤척일 깊은 밤과, 아직까지도 내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못난 내 모습에 지친다. 생각해보면 넌 내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을 빼면, 단 한 번도.

2012.06.26.23:24.
이지수 Blue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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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새벽부터 바닷가에 나와 있다. 남자는 멀찍이 서서 여자를 바라본다. 남자가 마을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간혹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바닷가에 나와 보면 늘 같은 자리에 그녀가 서 있었다. 여자는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만 보았다. 해가 지면 집에 돌아갔고, 다시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바다로 나왔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벌써 몇 달째라 했다. 마을에 딱 하나뿐인 구멍가게에도 들리지 않고, 우편으로 무언가가 오는 것도 아닌데,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건지 모르겠다며 여관 주인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왜 저러고 있는 거냐는 물음에 낸들 아냐고 답하셨지만, 이내 죽은 자식 때문이라며 말을 이으셨다.
아주머니의 말씀대로라면 여자는 작년 이맘때쯤 혼자 마을에 왔다. 한껏 배가 부른 몸으로, 짐이 가득한 가방 하나를 끌고 이사를 왔다고 한다. 여자는 일을 구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본 여자의 모습은 이따금 가게에 들러 얼마 되지 않는 먹을거리를 사 가거나, 해가 질 때쯤 혼자 바닷가를 걷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여자가 임신한 몸인 데다 아직 마을에 적응하지 못해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사 온 지 두 달이 되지 않아 여자는 아이를 낳았고, 다시 채 두 달이 가기 전에 아이는 그녀의 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이를 낳을 때도, 죽은 아이를 바다에 뿌릴 때도 여자는 혼자였다. 아이를 낳은 뒤엔 외출조차 하지 않았고, 아이가 죽은 뒤엔 지금처럼 바다만 볼 뿐이었다. 심지어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도 옆집 사람이 아기 울음소리를 들어서 알았다. 아이가 죽은 것 역시 여자가 바닷가에 재를 뿌리는 모습을 누군가 우연히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여자가 제대로 생활은 하고 있는 건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여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었다. 기척이라도 했으면 도와줬을 텐데, 사람이 왜 그렇게 야박한지 모르겠다며 아주머니는 혀를 차셨다. 애비가 누군지 참 몹쓸 놈이라고, 지 자식이 태어났다 죽은 걸 알기나 하는지, 하긴 그걸 안다면 저년이 저러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하셨다.
남자는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바닷가 입구까지 나가 여자를 바라보고 섰다. 오가며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여자만 보며 오래 서 있는 건 처음이었다. 여자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바다만 보았고, 남자는 그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마을 어르신은 남자에게 그렇게 서 있는 건 저년 하나로 충분하니 괜히 이상한 거 따라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해가 지며 바다 위에 붉고 긴 선을 긋자 여자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발치만 보며 걷던 여자는 마을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남자를 발견했다. 일 년 반 만에 만남이었다.

2012.05.28.29:00.
Clazziquai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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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만 나누어 줄 수 없나요. 사람은 모두가 죽지만 누구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면 보다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조금은 더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전 제게 남은 시간을 알고 있어요. 누군가는 이런 저를 축복받은 삶이라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주받은 인생이라 했죠. 당신이 보기엔 어떤가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줄어드는 걸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기분이 어떤 건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건 축복도 저주도 아니에요. 현실의 무게 앞에 축복과 저주는 뜬 구름처럼 가볍고 무의미한 것일 뿐이죠.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죽음을 본다고 하잖아요.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는 죽음이 보이기에 그들의 눈빛 속에서도 죽음이 느껴지는 건가 봐요. 전 그것이 죽음인지 몰랐어요. 제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그것이 있었으니까요. 덧셈뺄셈을 배우고 가장 먼저 한 건 제가 몇 살에 죽을지를 계산한 것이었어요. 몇 시간이 걸렸어요. 계산을 하면서도 줄어드는 시간이 무서워 손을 떨어야 했어요. 곱셈과 나눗셈을 배우고 나니 채 일 분이 걸리지 않더군요. 너무나 쉽게 제게 남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었어요.
잠들 때면 깨어났을 때 줄어있을 시간을 생각하며 눈물 흐리고, 눈을 뜨면 성큼 다가온 죽음이 무서워 몸부림쳤던 저를,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어쩌면 당신은 제게 죽음이 보인다면서 왜 그런 일로 헛되이 시간을 보내느냐고 말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순수한 공포와 불안 앞에서 사람은, 아니 적어도 전 그렇게 이성적일 수 없어요. 그건 엄마를 찾는 갓난아기에게 곱셈과 나눗셈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일이에요. 숫자가 작아지고 결국엔 자릿수가 줄어드는 끔찍함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년에서 달이 되고, 결국엔 날이, 시간이 되어 목을 조여 오는 잔혹함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옆자리에 앉아 날 바라보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당신은 상상이나 할 수 있나요. 외면하려 할수록 더 가까워지는 죽음을, 옆에 앉아 당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죽음의 눈빛을.
누군가의 현실은 당신이 상상했던 어떤 것보다 잔인해요. 수도 없이 떠올려 왔던 죽음이지만, 이렇게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지니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네요.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익숙해질 수도 없나 봐요. 늘 함께 했던 것이라 생각했는데 낯설기만 하네요. 오늘이 지나면 이것도 끝이겠죠. 안녕, 그리고 안녕. 마주보게 된 죽음과 언젠가 그 옆에 앉게 될 모든 이들에게.

2012.05.19.29:04.
Casker 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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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을 넘게 기르던 고양이가 죽어 묻어준 다음 날, 잠에서 깬 남자는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그날부터 보름이 넘도록 왠지 모르게 피곤하고, 이상할 정도로 몸의 기운이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처음엔 고양이를 잃은 상실감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증상이 심각해지자 남자는 병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장이 하나 없으시네요, 수술 언제 하셨어요. 남자는 신장은커녕 맹장 수술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의 몸에 수술 흔적이 없는 걸 확인한 의사는 결과가 잘못 나온 것 같다며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검사를 했다. 결과는 같았다. 남자의 몸에는 신장이 하나뿐이었다. 올해 초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남자의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채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신장 하나가 사라졌다. 남자는 물론 의사조차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외엔 어떤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랄지 남자의 하나 남은 신장은 건강했다. 의사는 만약 지금 그가 겪는 증상이 사라진 신장 때문이라면, 몸은 오래지 않아 거기 적응할 것이고 건강도 회복될 것이라 말했다.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던 남자는 이튿날 다른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가 알게 된 건, 어제 본 의사가 참 차분한 사람이었구나, 라는 사실뿐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며 남자는 많은 생각을 했다. 결국 그는 고양이가 죽은 날 자신의 신장 하나도 사라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론이었다. 몸에 이상이 나타났던 날을 떠올려보면, 그날은 아니더라도 그쯤 언젠가가 분명했다. 꿈같은 얘기지만 현실이었다. 남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고민했지만, 의사의 말대로 그의 몸은 점차 하나뿐인 신장에 적응했고 이내 아무 일 없던 듯 건강을 되찾았다. 대부분의 고민이 그렇듯 사라진 신장에 대한 생각 역시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 희석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가끔, 남자는 왼쪽 허리 언저리를 만지며 고양이를 떠올리곤 했다.

2012.05.13.27:56.
Savina & Drones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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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빌라 한 동이 사라졌다. 새벽에 우유를 배달하던 대학생은 사라진 건물을 찾아 동네 한 바퀴를 더 돌아야했다. 주변엔 이미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뿐이었다. 몇 해 전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혹은 누군가에게 떠밀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주변을 통틀어 빌라에 사는 세 가구 여섯 명만이 남아있었다. 대학생은 결국 우유 두개를 배달하지 못 했다. 우유를 남겨갔다가 어느 때보다 혼이 난 경험이 있던 대학생은, 배달하지 못 한 우유 두 개를 마신 뒤 빈 팩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정오가 되어서야 집배원을 통해 빌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소식은 인터넷에 먼저 퍼졌다. 누군가는 마을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말했고,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다, 정부에서 비밀리에 실험을 했다, 밤새 굉음을 들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소문은 관심을 먹고 자라났다. 방송국이 차례로 빌라 실종사건을 보도했고, 내로라하는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의견을 내놓았지만 결론은 하나같이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다, 였다. 추가보도가 계속되었지만 떠도는 소문을 정리한 하나마나한 얘기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사라진 빌라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며, 재개발로 피해를 보게 된 누군가가 허위 사실을 퍼트린 거라는 주장이 새롭게 떠올랐다. 뒤이어 답을 찾지 못하던 언론과 전문가들이 사건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사람들은 빌라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역 사람들의 증언은 물론 빌라의 모습이 담긴 예전 사진과 영상이 의심을 받았고, 처음부터 그런 건물은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허물어 사라진 건물이다, 등의 주장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결국 사건은 진위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공허한 논쟁이 되풀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에 피라미드나 에펠탑을 지운 사진과 함께 밤새 무엇이 사라졌어요, 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빌라가 우주선처럼 발사되거나, 바퀴나 발을 달고 이동하는 등의 합성 사진이 경쟁적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하루 동안 사람들 입에서 바쁘게 오르내리던 빌라 실종사건은, 이튿날 터진 어느 연예인의 열애설에 묻혀 사라졌다. 인터넷엔 연예인의 예전 사진과 인터뷰 자료를 통해 찾은 열애설의 증거가 속속 올라왔고, 기사와 방송에는 연예인의 지인과 측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후 지하철 난동 사건과 성폭행, 또 다른 연예인의 이혼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인터넷과 각종 언론을 뒤덮었다. 빌라 실종 사건은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엔 사건이 너무 많았고, 유명인의 스캔들이나 이혼, 지하철에서 난동을 부린 누군가의 영상에 비해 빌라 실종 사건은 현실적이지도, 그렇다고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새로운 소문은 하루에도 몇 개씩 쏟아졌고, 전문가와 교수들은 해야 할 일과 말이 너무나 많아 무언가를 조사할 시간이 없었다. 두 달이 채 가기 전에 빌라가 있던 곳엔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반년이 지난 뒤엔 사라진 빌라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건물이 그 자리에 세워졌다. 앞 다투어 이사 온 이들 중 누구도 그 곳에서 한 동의 빌라가 사라졌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충분한 돈을 지불했기에 그런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아무도 사라진 빌라에 살던 여섯 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2012.05.02.23:05.
Radiohead Karma Pol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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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1000pcs 퍼즐을 맞춘 적이 있다. 완성된 그림도 없고 비슷비슷한 조각이 많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던 그 퍼즐에는, 숲이 그려져 있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숲의 전경엔 붉은 노을빛이 번지고 있었고, 나무들은 거대한 새로 변해 무리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그곳이 서쪽 끝에 있는 숲이라 했다. 해가 뜰 무렵 옅은 안개 사이로 하나 둘 모여든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해질 무렵이 되면 노을빛을 받은 나무들이 새로 변해 지평선으로 날아가는 곳이라며, 엄마는 서쪽 숲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의 이야기는 퍼즐의 그림보다 생생하고 신비로웠다. 난 엄마가 그곳에 갔다 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듣는 나보다 말하는 엄마가 더 이야기에 빠져있는 것 같았으니까. 언제 가보았냐는 내 질문에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었다고 했다.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는 내 물음에 엄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가 고작 6살인 내게도 너무나 슬퍼보였기에, 난 커서 돈 많이 벌면 꼭 엄마와 함께 그곳에 가겠다 했고, 엄마는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서쪽 숲은커녕 변변한 여행 한 번 해보지 못하시고 병원에서 눈을 감으셨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삼일 가까이 잠만 잤다. 꿈속에서 난 어릴 적 그날처럼 엄마와 퍼즐을 맞추었다. 한참을 맞추다 거의 완성할 때쯤, 난 조각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결국 남은 조각을 모두 맞추고도 퍼즐은 완성되지 못한 채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었다. 새의 날개가, 나뭇가지가, 노을빛이 채워지지 못한 채 빈 공간으로 남았다. 혹시 어딘가에 퍼즐 조각이 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 찾는 내 등 뒤로, 멍하니 퍼즐을 바라보시던 엄마의 한마디가 들렸다. 끝내 가지 못했구나. 꿈은 거기서 끝났다.
엄마와 난 완성된 퍼즐을 방 한쪽에 옮기곤 몇 달이고 그대로 두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퍼즐을 보며 엄마가 해준 이야기와 내가 한 약속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니까 그 퍼즐은, 이를테면 나의 첫 번째 소망과 같은 것이었다.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땐 퍼즐을 허무는 게 슬퍼 울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엄마는 이사 가자마자 퍼즐부터 맞추자며 우는 날 달랬다. 간신히 눈물을 멈춘 나와 엄마는, 퍼즐을 맞췄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조각을 하나씩 상자에 담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허물어야만 한다는 기억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인지, 이사한 뒤엔 한 번도 퍼즐을 꺼내 맞추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짐을 뒤져 퍼즐 상자를 찾았다. 20여년 만에 다시, 홀로 퍼즐을 맞췄다. 꿈의 잔상이 남아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필사적으로 맞춰서인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허나 퍼즐은 완성할 수 없었다. 조각이 부족했다. 꿈에서처럼 새의 날개가, 나뭇가지가, 노을빛이 빈 공간으로 남았다. 장례식 내내 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엄마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고 왠지 나만은 울어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끝내 가지 못했구나. 엄마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엄마와 난 한 번도 퍼즐을 완성한 적이 없었다. 엄마가 어디선가 퍼즐을 가져왔을 때부터 조각은 부족했다. 완성할 수 없는 퍼즐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일주일이 지났다. 퍼즐을 허물던 날처럼 난 서럽게 울었다. 달래주는 사람이 없어 오래도록 울 수 있었다.

2012.03.18.24:15.
이적 서쪽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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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인파 속에 섞여 지나가는 흐릿한 사람들을 본다. 흔히 말하는 유령이다. 소녀는 어릴 때부터 유령을 볼 수 있었다. 유령은 영화에서처럼 하늘을 떠다니거나 하얀 죽처럼 생기지 않았고, 벽을 뚫고 다니거나 몸이 자유자재로 변하지도 않았다. 사람처럼 옷을 입고 두 발로 걸어 다녔으며, 문으로 드나들고 버스나 지하철도 탔다. 누가 봐도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기에, 오랜 시간 소녀는 그들이 유령인 줄 몰랐다.
소녀가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탔던 어느 날부터였다. 그날 버스에 먼저 오른 소녀는 빈자리가 없어 의자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때 뒤에 탄 소녀의 엄마가, 자리 있는데 왜 서서 가려 하냐며 소녀의 반대 손을 잡아당겼다. 분명 버스에 빈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소녀의 엄마는 성큼성큼 뒷자리로 갔고, 두 사람이 다가가자 앉아있던 학생 한 명이 당연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소녀의 엄마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받을 만큼 나이가 많지 않았다. 소녀의 엄마와 자리를 비켜준 학생 모두 양보를 받거나 하는 기색도 없었다. 엄마는 소녀를 자리에 앉혔다. 소녀는 언니가 이번에 내리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학생은 문 옆에 서서 다섯 정거장을 더 간 뒤에야 버스에서 내렸다. 그 뒷모습이 순간 흐릿하게 보여 소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나서야 소녀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까 여기 어떤 언니 앉아있었는데, 왜 빈자리라고 했어? 응, 누구? 어떤 언니 앉아있었잖아, 이런 안경 끼고 교복 입고, 되게 큰 가방 들고 있던 언니. 얘는 그새 꿈을 꿨나, 여기 아무도 없었어.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엄마는 아무도 보지 못한 것처럼 얘기했다. 아무리 소녀가 열심히 설명해도 엄마는 그런 사람 없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소녀가 같은 얘길 반복하자 엄마는 그럼 지금 그 언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학생이 내리고 두 정거장이 지난 뒤였다.
그날 이후 소녀는 버스에서 만난 학생과 비슷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보았다. 남자와 여자, 학생부터 노인까지, 성별과 나이는 다양했지만, 그들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앉을 곳을 양보했다. 남의 자리를 빌려 앉았다가 주인이 나타나 비켜주는 사람처럼, 그들은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연스레 일어났고, 다가온 누군가는 처음부터 빈자리였다는 듯 그곳에 앉았다. 그들은 그렇게 일어나 몇 정거장이고 서서 간 뒤에야 차에서 내렸다. 심지어 그들은 문 옆에 기대서서 가다가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다른 곳으로 갔다. 사람들은 늘 그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이 무섭기라도 한 듯 물러났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조금씩 흐릿해졌다. 처음엔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매번 그런 일이 반복되자 소녀는 그들이 원래 흐릿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내 그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이들이 왜 흐릿한 사람들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지도 알았다. 그날 엄마가 교복 입은 언니를 보지 못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 오직 소녀만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흐릿하게나마 소녀의 눈에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소녀는 그들을 유령이라 불렀다.

2012.03.16.27:44.
시와무지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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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의 정원을 기억해.

2011. 12. 30. 07:35 /2011-



그 밤의 정원을 기억해. 내 키의 두 배만 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고, 그 가운데로 작은 오솔길이 이어져있었어. 정확한 계절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겨울의 초입 혹은 끝자락이었던 것 같아.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었고,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났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나무는 앙상한 가지뿐이었어. 왠지 그 나무들은 봄이 되어도 싹을 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어. 정원 어디에서도 녹음은 찾아볼 수 없었어. 풀이 말라 색이 바랜 것도, 눈이 내려 사방을 덮은 것도 아닌데, 구름에 가린 옅은 달빛 아래 정원은 화산재라도 뒤집어쓴 듯 온통 회색빛이었어. 처음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어. 누군가가 거대한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림이라도 그려놓은 것 같았어. 정말 뭐가 묻은 건 아닐까, 나무를 만지는 내 손이 이질적으로 느껴졌어. 색을 가진 것이라곤 너와 나뿐이었어. 흑백텔레비전 속에 들어온 것처럼. 놀라는 나를 보며 너는 그저 웃고만 있었어.
짧지 않은 오솔길을 걸으며 너와 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회색의 정원. 네가 매일 밤 거니는 곳이라고 했어. 그 얘길 들어서일까. 낯설었던 풍경은 어느덧 눈에 익숙해졌고, 몇 번이고 와본 곳처럼 너와 함께 정원을 걷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어. 한참을 걷다 문득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서야 알았어. 정원은 너를 닮아있었어. 유치한 얘기지만, 그 순간 난 너의 꿈에 초대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
달빛이 약해서일까. 나무가 빼곡히 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솔길은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았어. 난 그저 너를 따라 걸었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나무 끝에 비스듬히 걸려있던 달이 하늘 가운데 왔을 때쯤 오솔길은 끝났어. 그곳엔 작은 연못이 있었어. 너무 어두워서인지 못은 주변을 두른 나무조차 비추지 못하고 검게 고여 있었어. 옆을 돌아보자 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어. 구름이 넓게 펼쳐진 듯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어. 달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형태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고. 문득 이 모든 것이 정말 꿈은 아닐까, 혹시 이대로 깨는 건 아닐까 불안했어. 다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네가 없을 것 같았거든. 갑작스러운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하던 그때,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쏟아졌어. 그날 처음으로 본 선명한 달이었어. 눈이 부셨어. 내내 어둡던 하늘에 갑자기 비췬 달빛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달빛 아래 회색의 정원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어. 앙상한 가지뿐이던 나무와 넓게 드리운 풀밭이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였어. 백금과 은을 모아 만든다 해도 그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정원은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게 가라앉았던 연못은 한가운데 달을 띄우고 주변에 선 나무들을 비추며 거대한 은빛의 별이 되어 일렁였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꿈이라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아름답다는 말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어. 간신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을 때, 놀라는 나를 보며 말없이 너는 그저 웃고만 있었어.

2011.12.29.31:35.
달에닿아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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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도록 잠들지 못했다. 너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돌아온다 했다. 오늘 밤 반드시 돌아올 거라 그랬다. 계절의 초입임에도 겨울의 밤은 지겨우리만큼 길었다. 전화기를 두 손에 쥔 채 눕지도 못하고 밤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올 리 없었다. 네가 돌아오는 날인데 어떻게 잠들 수 있겠어.
춥잖아. 다음부턴 나오지 마.
그때 그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오늘 밤도 집 앞에 서있었을 것이다. 손발이 얼어붙고 감각이 무뎌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그날 밤처럼, 추위도 잊은 채 너를 기다렸을 것이다. 감정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너를 기다릴 때면 오직 설렘과 불안만 느낄 수 있는 사람처럼 다른 감각에 둔해졌다. 추위나 허기는 물론 피곤함도 느끼지 못했다. 너를 기다리는 밤은 늘 그랬다. 몇 해가 지났지만 이 밤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안해하지 마. 조금 늦더라도 꼭 돌아올 테니까. 너도 알잖아. 내가 머물 곳은 여기뿐이라는 걸.
처음엔 막연한 불안이었다. 오랜만에 느낌 감정이라 지나치게 유난을 떠는 거라 생각했다. 허나 오래지 않아 근거 없는 불안이 아님을 깨달았고,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너의 조금은 내겐 너무 긴 시간이었다. 한 번, 두 번, 반복된 너의 빈자리에 나는 미치도록 초조했다. 무언가에 중독돼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너의 공백은 나를 무너뜨렸다. 도대체 무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던 그날 밤, 네가 두 번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난 너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아니 정신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며칠이 지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넌 다시 짐을 꾸리고 있었다. 가는 거야? 신기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네가 없는 동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지난날이 무색할 만큼, 다시 떠나려는 널 보며 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네가 떠나는 모습을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익숙해진 걸까. 익숙해질 수 있는 감정이었을까. 단출한 식사. 짧지만은 않은 포옹. 멀리 나가지 않았던 인사. 넌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난 오래 서있지 않았다. 네가 떠난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가. 아니면 또 울면서 날을 지새웠던가. 확실한 건 그 이튿날부터 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지난 몇 해간의 기억이, 너와의 추억이 모두 긴 꿈이었던 것처럼, 너와 완전히 이별한 듯 그렇게 살았다. 날이 밝는다. 아직 달은 지지 않았다. 겨울의 밤은 해가 떠도 끝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올 리 없다. 올 리, 없다.

2011.11.15.29:39.
이상은 초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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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빠짐없이 치웠다. 바쁜 하루였다.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움직인 것 같은데 시간은 빠르게 갔다. 커다란 상자를 준비했다. 방을 정리하며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았다. 네가 준 것, 너와 함께 산 것, 너의 손이 닿았던 것, 너의 사진, 너를 떠올릴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건 모두. 방 구석구석에 너의 흔적이 숨어있었다. 나조차 잘 모르는 곳에서 네가 발견되었을 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넌 책장 뒤에 번진 곰팡이처럼 지저분하고 눅눅하게 내 방 곳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진한 곰팡이였다.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로 몇 번이고 문질러야 했다. 칼로 파낸 것이 아닌 이상 지워지지 않는 건 없었다. 너와의 기억은 진하지만 날카롭진 않았다. 가득 찬 상자가 두 개. 그리고 반 쯤 찬 상자가 하나. 세 개의 상자에 나눠 담긴 넌 버려진 고양이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생각도 잠시. 단 한 번도 애처로운 눈빛 같은 건 지은 적 없는 너였기에, 정작 버려진 건 고양이가 아닌 나이기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다.
상자를 버리고 돌아온 방은 어딘가 휑하고 허전했다. 몇 개 안되는 가구의 위치를 바꿔보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원래대로 옮겼다. 책상 위를 정리하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을 책장에 꽂았다. 쌓여있던 영수증과 우편물을 정리해 버렸다. 빨래로 가득 차 있던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기로 먼지를 치우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욕실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했다. 세탁기 시간이 남아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한 바퀴 돌리도록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없어 몇 번이고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았다. 건조된 빨래를 개어 옷장에 넣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는 한 끼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배는 고프지 않았다. 밥을 먹으려다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 욕조에 물을 받았다. 컵에 우유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은 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무언가 정리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새롭게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소리와 함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고 별 뜻 없이 고개를 돌린 곳엔
네가 쓰던 면도기가 있었다.
고요와 평온이 한 순간에 깨졌다. 믿기지 않았다.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 갑자기 어디선가 생겨난 것 같았다. 다른 어떤 물건이 있었다 해도, 심지어 낯선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한들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현실감이 없었다. 저게 왜 여기 있는 거지. 깜빡 잊고 치우지 않았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방 안 모든 곳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면도기 바로 옆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의 칫솔이 놓여있었다. 칫솔은 치웠으면서 면도기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자리엔 면도기는커녕 무엇도 놓여있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알 수 없었다. 난 그렇게 한참동안 면도기를 보았다. 너의 면도기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욕조에서 나와 면도기를 집어 들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면도를 하던 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에서 막 깨었을 때 까끌까끌하던 네 수염도. 그 수염으로 나를 간지럽히며 웃던 너의 얼굴이, 힘든 일이 있어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기분 좋게 웃어주던 너의 미소가, 괜찮다며 나를 위로해주던 너의 목소리가, 품에 안기면 은은하게 느껴지던 너의 향기가, 따뜻하고 포근했던 너의 체온까지. 빠르고 강렬하게 너의 기억이 쏟아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치웠다 생각했다. 여섯 개의 칼날이 손목을 긋고 지나갔다. 고작 세 개의 상자로 버려질 네가 아니었다. 정리해야 하는 건 방이 아니었다. 내 몸이,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무언가 정리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새롭게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2011.05.06.26:16.
Quintero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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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이 남아있었다.

2011. 4. 25. 00:40 /2011-



화분이 남아있었다. 모두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것도 네가 준 것이었다. 꽃만 안 피면 되는 거지. 이거 꽃 안 펴. 이게 다 자란 거야. 삭막하잖아, 컴퓨터하고 사무용품 밖에 없는 책상이라니. 별로 크지도 않으니까 책상 위에 놔. 이것도 살아있는 거야, 함부로 버리고 그러면 안 돼.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기억에 남아서일까. 모든 게 버려진 뒤에도 화분은 남았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누가 누굴 버렸는지 따지는 건 의미 없다. 이별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려지는 일이다. 물 안줬지. 하여튼 이러면 안 된다고. 너 물 안마시고 살 수 있어? 얘도 물을 줘야 살지. 말려 죽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다 너. 누가 더 잔인했던 걸까. 조금씩 마르고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지기 직전까지 갔다. 물통을 쥐고 있으면서 단 한 방울도 떨어뜨려주지 않았다. 물통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뒤늦게 떨어진 물방울은 메마른 잎사귀를 바스러뜨렸다. 지쳤던 거다. 그저 간신히 견디고 있었을 뿐, 물방울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나약해져 있었다. 멍하니 죽어버린 잎을 바라보며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뿌리 끝까지 마른 풀은 신이 아닌 이상 살릴 수 없었다. 너와 난 신이 아니었다. 식물 하나를 말라 죽인 허술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을 뿐이다. 말라 죽은 풀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작은 화분에 갇혀 살던 식물은 죽어서조차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몇 십 년이 지나야 썩어 없어질 비닐봉투 속에서 온갖 폐기물에 뒤섞여 악취를 견디며 고통스러워 할 거다. 지옥이 따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버려졌다. 버려진 것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화분이 남아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어디선가 낯선 향이 나 고개를 돌려보니 화분이 있었다. 꽃 하나 피지 않은 풀에서 향기가 났다. 이 풀에서 향기가 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2011.04.24.24:40.
Savina & Drones Where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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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 나뒹구는 맥주 캔만 늘고 있어. 아무리 취해도 잠이 오지 않아. 어떻게 하라고. 새벽이잖아. 마음껏 소리칠 수도 없어. 전화기에서 지운 네 번호가 왜 술만 마시면 또렷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그날 네가 울었던가. 난 울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날도 난 글을 썼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어. 어처구니없지. 실감이 안 났던 걸까. 오히려 그날 평소보다 글이 잘 써졌다면 넌 믿을까. 아주 익숙한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난 키보드를 두드렸어. 그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평소보다 늦게 잠든 어느 날, 난 죽은 듯 긴 잠을 잤어.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뒤척이는 일 한 번 없는 깊은 잠이었어. 서너 장의 페이지를 한꺼번에 넘긴 듯 시간이 뭉텅이로 넘어갔어. 잠에서 깼을 땐 저녁이었어. 습관처럼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떠지지 않는 눈을 비볐어. 문서 폴더로 들어가 잠들기 전까지 썼던 글을 클릭해 열었어. 마우스 휠을 돌리며 글을 읽던 난, 내가 아직 잠에서 덜 깬 줄 알았어. 쓰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글이 적혀있는 거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 썼던 부분부터 다시 읽다가야 깨달았어. 그건 너에 대한 글이었어. 난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어. 거기엔 내가 알고 있던 너, 내가 기억하는 네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어.
정신을 차렸을 때, 노트북은 모니터가 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난 책상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울고 있었어. 겁에 질린 짐승처럼 서럽게 울었어. 그날 난 먼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네 뒷모습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그날 내가 울었던가. 넌 울지 않았던 거 같은데.

2011.04.17.30:56.
Athlete Cha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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